AD 313년 콘스탄티누스 기독교 공인 후, “예수는 신인가 아닌가?”의 치열한 교리 논쟁이 있었다.
로마 황제 입장에서는 예수가 신이건 아니건 간에 제국 분열을 막는데 어느 쪽이든 통합된 종교 이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투표를 통해 ”예수는 신“으로 결정되고 삼위일체론이 확립됨으로써 교리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황제의 지원에 힘입어 논쟁에서 승리한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와 관련된 책들을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양판 분서갱유인 셈이다. 진실과 상관없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냉혹한 원칙이 종교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성경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완성본 형태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은 거의 1천여 년에 걸쳐 서로 다른 수십 명의 저자가 쓴 것이며 그중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른 것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다. 이것이 오늘날 정경의 기본이 되었다.
말하자면 “권장도서 100권”처럼 방대하게 흩어져 있는 책 중에서 자신의 이념에 맞는 것들만 모아 목록을 만든 것이다. 자료 중에는 당연히 입맛에 맞지 않거나 허무맹랑한 책도 있었을 것이다. 문학박사만 글 쓰는 게 아니다. 지식인들만 글 쓰는 게 아니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다를 것이 없다.
개중에는 나 같은 사람이 심심풀이로 잡담하거나 습작한 것이 아타나시우스 눈에 띄어 정경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성경에는 역사적으로 맞지 않거나 신화와 유사한 내용이 적지 않다.
1945년 이집트 한 절벽 밑에 숨겨져 있던 항아리 안에서 고문서가 발견되었다. 이 책은 아타나시우스가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에 불복해 누군가 몰래 숨겨 놓은 것으로 추측되었다.
판독결과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초기 기독교의 경전 사본들이었고 <나그함마디 문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이 문서에는 오늘날 신약성경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릴 수 있는 도마복음도 있었다.
도마가 누구인가? 예수의 12 제자 중 한 명 아닌가? 그의 이름으로 집필된 책이라면 어느 기록보다 사실에 근접하다고 볼 수 있다. 도마복음을 소개한 책은 종교학 전문가인 오강남과 도올 김용옥의 저술도 있다.
현재까지 연구 결론은 도마복음이 예수의 진짜 말씀에 가장 근접한 경전이며 오늘날 신약성경의 공관복음도 도마복음을 기초로 하여 집필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기존의 교단을 뿌리째 흔들 수 있는 도마복음을 위서로 단정하여 아직까지 연구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언론회(대표 이억주 목사)는 도마복음을 언급할 가치가 없다며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과연 66권 성경 속에 포함된 것도 아닌데 복음이라고 주장하고, 또 기록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가운데 도마가 썼다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뿐만이 아니라 4 복음서와 같은 정경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이미 1,600년 전에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을 또다시 끄집어내서 ‘기독교가 나갈 방향을 제시한다’는 선전(宣傳)은 무엇인가?”
내가 볼 때 목사라는 이 사람은 기독교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주장하는 논리가 기독교인답다.
66권 성경은 기득권자들의 선별에 의한 것이지 그것이 특별나서가 아니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도마복음이 도마가 쓴 것이 아니라면 그 후에 쓰인 공관복음은 전부 유령들이 썼을 것이다.
1600년 전에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권력 싸움에서 밀려났기 때문이지, 이겼다면 그것이 정경이 되었을 것이다. 권력싸움에서 이겼다고 진실이고 졌다고 거짓이 아니다. 승자의 논리가 진실이 아닌 경우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주장하는 내용이 기독교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비쳐진다. 지금 기독교 성직자 대부분의 심정이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는 도마를 “의심 많은 제자”로 폄하하고 있지만, 의심 많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힐까 봐 도망쳤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부활을 알렸을 때 12제자 모두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예수가 마가 다락방에 나타나서야 그것을 믿었다. 보지 않고 믿지 않기는 도마나 다른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마만 특별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승을 따르는 신심은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두터웠다.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려고 했을 때, 머뭇거리는 다른 제자와 달리 도마는 “우리도 스승을 따라 죽으러 가자”고 했다.
초기 기독교에서 도마의 위상을 깎아내린 이유는 아마도 “도마복음”과 관련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한 마당에 도마복음이 영지주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수의 제자라지만 자신들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내친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바울이 정립한 사상에 의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예수가 창시한 종교가 아니라 바울이 창시한 종교다. 바울은 예수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오리지널 예수는 온데간데없고 예수를 각본 한 바울 신학이 기독교 본질이 되었다.
114절에 달하는 도마복음 내용을 보면,
예수의 말씀에 현재 기독교가 주장하는 말세론이나 천국, 지옥 이야기가 없다. 천국은 하늘에 있지 않고 각 개인의 깨달음에 있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기적, 예언 성취, 부활이나 대속, 최후의 심판 같은 표현이 없다.
예수 자신을 메시아나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표현도 없다.
신(神)으로서 예수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각자의 깨우침을 독려하는 "깨달은 자"로서만 나타난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를 연상시킨다.
가령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서 “나”는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 자신을 의미한다. 즉 자신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스스로 자각하고 깨우쳐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도마복음의 핵심 가르침이다.
천국이나 지옥도 마찬가지다.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새가 먼저 갈 것이고, 물속에 있다면 고기가 먼저 닿을 것”이라며 천국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 구절을 보면 지금까지 기독교는 이천 년 동안이나 있지도 않은 천국을 가지고 장사를 야무지게 한 셈이다. 지금도 천국 장사는 성업 중이다. 또한 "지옥"은 순전히 협박용으로 만들어 낸 용어에 불과하다. 도마복음에는 "지옥"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금식·기도 같은 종교의식에 대해 묻자 예수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마라, 싫어하는 것은 하지 마라.”고 꾸짖는다. 조직적인 선교활동을 통해 교세를 확장해야 하는 기독교 입장에서는 거북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종교의식이 필요 없다고 하면 십일조나 헌금은 어디서 걷어야 하나?
도올 김용옥은 숱한 기적과 부활을 선보인 예수의 모습을 후대의 창작으로 봤다. 인간 예수는 살아생전 열심히 활동했으나 뚜렷한 성과는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미화하고 포장하기 위해 기적과 부활이라는 이야기를 집어넣어 드라마화했다는 것이다.
도올은 복음서 저자들을 “작가”라 부른다. 이 부분은 내 생각도 같다. 기적과 부활이라는 이야기를 집어넣어 예수를 드라마화했다는 것은, 민희식 박사 “성서의 뿌리”를 보면 부정할 수 없는 고고학적 사실이다. 나는 “죽음에 대해서”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사후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죽은 사람뿐이다. 그러나 시체가 펜을 들어 그것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일은 없다.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소설일 수밖에 없다. -죽음에 대해서-』
『절대로 알 수 없다는 상황에서 신화가 나오고 가짜가 탄생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후세계와 관련한 사이비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보이스피싱과 비슷하다. 보이스피싱에 넘어가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죽음”은 알 수 없는 비밀의 방이기에 얼마나 많은 상상력이 거기에 동원되었을 것인가? 힌두교 내세관을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대하소설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념은 심리적인 기대감으로 채워진다. 굿판에 귀신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심리적인 위안이 되는 것과도 같다. -죽음에 대해서-』
초기 기독교는 종교를 세속화했다. 지역별로 교구를 획정하고 “죄”을 무기로 삼아 주민을 이념의 노예로 삼았다. 무엇이든 “절대화”되면 사악해진다. 마녀사냥이 그렇고 아우슈비츠도 그렇고 킬링필드도 그렇고 김일성 유일사상도 그렇다. 절대화 뒤에는 가려진 위선이 희생자를 세뇌시키고 그들의 무지를 이용해 먹고 산다.
“죄”는 행동이 아니라 “무지(無知)”가 만든다. 범죄행위도 행동 이전에 무지가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기 때문에 죄를 저지른다.
개인적으로 오늘날 신도들을 무지로 이끌고 있는 무지한 기독교 성직자들이야 말로 진짜 죄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성직자가 아니라 선동가에 가깝다. JMS 기독교복음선교회, 오대양 박순자, 아가동산, 만민중앙교회, 신천지 등 대표 주자가 있지만, 위 한국교회언론회 글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대다수의 정통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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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위대한 침묵” 다큐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세상과 단절한 채 침묵 속에서 신을 향한 길을 찾는 수도자들의 삶, 프랑스 봉쇄수도원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TV, 신문, 라디오는 물론 전화와 편지도 원장의 특별한 허가 없이는 주고받지 못한다. 또한 육식이 금지되고 머리는 스님처럼 짧게 깎고 하루 세 번 미사와 기도를 위해 성당에 가는 것 외에는 모든 시간을 독립된 방에서 홀로 지낸다.
침묵이 그들의 생활방식이고 수련이기 때문에 영화 대부분도 대사가 없는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음향효과도 없고 사운드라면 새소리, 발소리 정도다. 제일 시끄러운 장면이라는 게 어떤 수사가 신발 밑창 고친다고 밑창에 망치질하는 것뿐이다. 영화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명상하는 기분이 든다.
나에게 그들의 수행은 종교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든지 수도원을 나와 일반인처럼 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위대한 침묵” 속에서 살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즉 자신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스스로 자각하고 깨우쳐야 한다는, 도마복음의 핵심을 실천하는 이들이다.
자각을 위한 수행은 종교를 떠나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정신적인 수양이다. 고독과 침묵은 수행의 동반자다. 영화 포스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
우리 대부분은 중생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궁극적인 삶과 죽음의 실체를 깨달은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부처, 노자, 장자, 예수 등 몇몇 성인에 한할 것이다.
그냥 사는 것과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사는 것은 다르다. 3살 어린이와 학식을 갖춘 성인만큼이나 인식의 깊이가 다를 것이다. 모르긴 해도 개미와 독수리 정도 차이는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 "존재"에 대한 의문은 수학이나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죽음을 알기 위해서는 죽음의 경지까지 가야 한다. 살아서 장님인 사람은 죽어서도 장님일 수밖에 없다. 깨달음은 개인의 정신적인 체험이기에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옛 선사는 홀로 서지 않으면 깨달음은 없다고 말한다. 스승은 그냥 도우미일 뿐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진정한 수행을 위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말까지 한다.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말고 홀로 서라는 뜻이다.
수도사들 삶을 보면 자연스럽게 고타마 싯다르타가 떠 오른다. 싯다르타는 하루에 나무 열매 한 알로 버티며 6년간 고행을 했다. 그 역시 고독과 침묵을 지키며 “위대한 침묵”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고행 모습은 미술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에 있는 “싯다르타 고행상”을 보면, 뼈와 살가죽만 남아 배와 등이 납작하게 붙고 핏줄이 그대로 드러난, 조각상만 봐도 그의 위대성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위대한 침묵”을 통해 나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본다.
기도 몇 마디로 천국을 얻으려는 자는 심보부터가 글러 먹었다. 자신을 수양하기보다는 천국을 탐하는 그 속된 마음부터가 시커멓다. 죽기 1분 전에 회개하면 천국 갈 수 있다는 천박한 무지, 마치 복권 당첨을 바라듯이 종교를 믿는다. 인간 사회만 해도 거저 얻어지는 법이 없다. 하물며 천국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찰스 킴볼은 자기 종교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할 때 종교는 사악해진다고 정의를 내린다. 오늘날의 종교, 특히 기독교는 집단 이기주의가 하나의 신앙이 되어 버렸다. 단군 동상 참수를 마치 사탄 처단하듯이 여긴다. 부처님 오신 날 사찰에서 행패 부리는 것을 무슨 십자군 전쟁처럼 여긴다. 이러한 무지는 두말할 필요 없이 저질 종교 지도자들 때문일 것이다.
진실은 소박함과 순수함에서 나온다. 관념이 저질일수록 행동도 저질이 된다.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구원은 멀어지고, 가진 것이 많을수록 신과의 거리는 멀어질 것이다. 나는 “거짓과 진실”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혼수나 외모, 재산을 보고 결혼하는 것이 사랑인가? 이것은 그냥 거래일뿐이다. 사랑과는 아무 상관없다. 결혼 상대자가 신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런 방식의 사랑이 신앙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신과 거래하려는 심리 자체가 신을 모욕하는 신성모독이다. 무엇을 바라고 믿는 것은 혼수나 외모, 재산을 보고 결혼하려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것이 탐이 나서다. 만일 천국이 없다고 해도 사람들이 신을 믿을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탐욕이 오해를 만들어 낸다.
마치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사듯이 “내가 믿었으니 너는 천국을 달라” 이런 식의 거래심리로 신을 믿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전지전능하다는 존재를 구멍가게 장사치 정도로 취급한다. 이런 믿음이 신에게 통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거짓과 진실-』
진정한 종교는 침묵을 벗 삼아 고독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불교의 가르침도 나는 그런 뜻으로 이해한다. 자신의 깊은 심연 속을 바라볼 때 바로 그곳에 자신이 찾는 신, 부처가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 도마복음에서 말한 예수의 오리지널 가르침이다.
봉쇄수도원에는 전 세계적으로 370명 수도자가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이들이 인류의 빛이 될지도 모르겠다. 싯다르타 단 한 명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구제되었다. 흉악한 범죄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로 인해 교화되었을 것인가?
고귀한 심성은 보석과도 같아서 스스로 빛을 낸다. 수도원은 봉쇄되었어도 빛은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그들이 침묵한다 해도 거룩하고 숭고한 심성은 물결처럼 퍼져 나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