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론과 물리학 -
제1철학 단상
제1철학은 “존재”에 관한 학문으로 “존재론”이라고도 불린다. 존재론을 형이상학과 다르게 보는 관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제1철학은 “존재란 무엇이고 그 원인은 무엇인가”의 질문에 대한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서양철학은 플라톤이 다져 놓은 기반 위에서 구축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최고봉으로 꼽는 학자도 있지만, 그의 스승이 플라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라톤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을 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 중앙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플라톤과 그의 제자가 철학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플라톤 머리 위에 군림했던 철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다. 사실 플라톤 철학은 두 철학자 사상을 섞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강물로 따지면 플라톤 위에 상류가 있었던 셈이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사상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다. 주장하는 내용이 서로가 정확하게 대립된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며 세계는 불변이라고 말한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발 담글 수는 없다”며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말한다.
나는 두 철학자의 사상을 물리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가령 세상이 불변하다는 쪽은 “에너지보존법칙”을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된다. 세상의 근본을 에너지로 바라보면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불변의 세계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반면에 세상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쪽은 감각체계로 바라본 세계다. 원자들의 요동이 멈추지 않는 이상 세상은 변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이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두 철학자 주장은 관점의 차이지, 서로가 대립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플라톤도 두 사상을 조합했다. 감각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변하는 존재(현실세계)와 이성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이데아)로 나누었다.
존재를 탐구하는 작업은 “존재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다. 물리적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실재”만을 존재로 정할 것인지, 관념이나 언어적으로 “있다”라고 표현되는 모든 것을 존재로 규정할 것인지부터가 애매하다.
플라톤도 이 문제를 고민한 듯하다. 있기는 있는데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가령 “無가 있다”라고 했을 때, 이 문장의 주어와 술어는 의미가 상반된다. 그러나 술어가 “있다”라고 단정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있는 것이라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無는 원래 없는 것인데, 언어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있는 것으로 의미가 뒤바뀌어 버린다.
언어는 관념의 산물이다. 때문에 언어 구조적으로 “존재”를 규정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가령 “꿈속에서 나타난 귀신”도 실재하는 존재로 봐야 할 것인가? 존재로 규정을 해놓고 그것으로부터 존재특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제1철학은 학문으로서의 유용성이 상실되고 만다.
따라서 플라톤은 제1철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러한 관념적인 존재특성들, 이 골칫덩이들을 한 군데로 모아 그것을 “이데아”라고 명명했다. 이데아는 철학 작업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종의 쓰레기통인 셈이다.
물론 플라톤 자신은 “이데아”를 쓰레기통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감각 차원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참된 실재로,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인식할 수 없다면 그것이 참된 실재인지 절대적인지 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데아를 제거하고 나면 “존재론”의 작업 대상은 하나만 남는다. 그것은 감각체계로 인식할 수 있는 현실 세계, 정확하게는 물질세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물리학이 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존재특성을 규명하는 수단이 다르다는 차이만 있다. 작업 도구가 철학이 사유인 반면 물리학은 수학이다.
제1철학은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의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를 시작으로 아낙시메네스(공기), 헤라클레이토스(불), 엠페도클레스(4원소설), 아낙시만드로스(무한자), 데모크리토스(원자), 피타고라스(수) 등 철학자들마다 만물의 근원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물리학이 제시하는 물질의 근원은 원자다. 원자를 더 쪼개면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쪼개지고 더 쪼개면 쿼크와 렙톤, 그리고 게이지, 힉스입자가 있다. 앞으로 더 늘어날지 모르지만 현재까지 물리학 표준모형에는 17개 기본 입자들이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밝혀낸 존재 근원에 대한 답은 잠정적으로 “17개 기본입자”라고 할 수 있다. 입자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만물을 이루고 제1철학이 규명하고자 했던 존재특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물리학은 그 존재특성을 수학적 방법으로 규명해 내고 있다.
그러나 물질 근원을 이루는 17개 입자를 찾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존재특성이 완전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실재하는 존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가 겹쳐져 있기도 한다. 그것이 존재하는가 아닌가의 기준은 관찰자에 의해 달라진다. 관찰자가 인식(상호작용)한다면 존재가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달도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성이론이 시간의 상대성을 밝혀냈듯이, 양자역학은 존재가 상대성임을 보여 준다.
“상대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대비되는 그 무엇을 말한다. 無가 있음으로써 有가 인식되고, 有가 있음으로써 無가 인식된다. 대비되는 것이 없다면, 가령 無만 있는 세계에서 有가 존재하거나 인식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비되는 상대가 없으면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존재의 특성이다.
결국 존재는 관찰자, 개인의 인식 차원의 문제다. 나와 세계가 대비되기 때문이다. 존재특성은 성인군자에게 물어본들 소용없는 일이다. 관찰자가 다르기 때문에 성인군자가 인식했던 존재특성을 그대로 복사해 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런 이유로 옛 선사는 홀로 서지 않으면 깨달음은 없다고 말한다. 스승은 그냥 도우미일 뿐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진정한 수행을 위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말까지 한다.
어떻게 보면 산속이나 수도원에서 수행하는 수도자들은 제1철학을 탐구하는 철학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재특성을 철학자는 언어로 탐구하지만 그들은 인식을 수단으로 그것을 탐구한다.
세계는 “나”와 “나 아닌 것” 두 세계의 관계이다. 관찰자로서 자신이 상대를 어떻게 보고 파악할 것인가의 문제다. “나”를 정의하고 “나 아닌 것”의 실재를 규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식의 끝, 경계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앎은 가장 깊은 지식의 끝이다. 그것이 지식의 한계이고 그곳에 존재의 원인도 드러나 있을 것이다. 궁극의 한계까지 다다르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을 본 사람은 개인적으로 싯다르타 외에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올바른 지식의 끝이야말로 희열이 넘치는 극락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 생물학적인 한계를 벗어난 해탈이 그 경지일 것이다. 일체의 두려움이나 고통이 없는 진리의 실체, 자신이 우주와 하나가 되는, 우주 창조자만이 느낄 수 있는 도파민 감성, 엔돌핀 강이 흐르는 존재특성이 그곳에 있을 것만 같다. 제1철학 여정의 종착점은 바로 그곳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