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구나. 그래서 다들 표정들이 그랬구나. 술에 잔뜩 취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는 세라의 주위에는 팔짱을 낀 그녀의 친구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역겨운 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보는 것처럼. 그런가. 내가 죄인인가.아닌데. 아닐 텐데.그럴 리가.
세라를 처음 본 곳은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내가 가입한 동호회였다. '영어 교환' 동호회라는, 굉장히 학술적인 목적이 다분한 동호회에서 세라를 처음으로 만났다. 단발에 작은 키. 동그랗고 큰 눈. 강아지처럼 귀엽다. 세라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제 막 제대했습니다. 잘부탁드립니다. H대입니다. 자기소개 차례가 되자 나는 인사했다.
"H대요? 저도 H대인데."
세라도 H대라면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이미 속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고, 연애도 시작했다. 이건 운명이야.
세라와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심지어 알고 보니 사는 동네도 같았다. 영어교환이 목적인 동호회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교환했다. 동호회가 끝나면 우리는 함께 밥을 따로 먹었고, 집도 함께 갔다. 헤어지고 나서도, 밥을 먹을 때에도, 자기 전에도, 나와 그녀는 함께였다.
우리는 동호회 밖에서도 만나기 시작했다.같은 학교였던 우리는 학생식당에서도, 분수대에서도, 그리고 광장에서도.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그녀의 눈을 슬쩍 바라봤다. 내 눈빛도 지금 이럴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지금 학교 앞 술집인데 와줄 수 있어?"
한밤중에 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이미 잔뜩 취해 있었다. 주위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학교로 향했다. 그녀가 많이 걱정됐다. 이렇게까지 취한 적은 없는데.
"왔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미 세라의 혀가 꼬이고 있었다.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심하게 비틀거렸다. 취한 세라를 자리에 앉힌 나는 그대로 옆에 앉았다. 세라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주위에는 세라의 대학 동기가 3명 앉아 있었다. 3명의 여자 동기들은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불청객이었다는 것을.
"혹시 누구세요? 세라랑 어떤 사이세요?"
그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아, 세라랑 동호회에서 처음 알게 됐습니다. 별다른 사이는 아니고요. 세라가 많이 취한 것 같아서 집에 데려다주려고요. 뭔가 묘하게 추궁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내가 혹시 무슨 잘못을 했나? 너무 바로 옆에 앉아버렸나? 잠깐 손을 잡아서 그런 건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세라, 남자친구 있어요."
네? 남자친구요?라고 되물었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은, 그들에게 있어 나는 세라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남자친구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
"세라, 오래 만난 남자친구가 있다고요."
지금 이런 말을 나에게 하는 이유는 뭘까. 혹시 세라는 그들에게 나에 대한 말을 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술에 잔뜩 취한 세라를 데리러 온 사람이 남자친구가 아닌 나여서였을까. 세라는 말이 없었다. 이미 취했기 때문이지만, 나에게는 그녀의 설명이 필요했다. 죄송합니다. 세라 잘 부탁드릴게요. 나는 죄송하다고 했다. 뭐가 죄송한지, 왜 죄송한지도 몰랐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세라를 만나자마자 쏘아붙였다. 진짜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5년이나 만났단다. 권태기인 것 같은데, 갑자기 내가 좋아졌다더라. 그렇다고 너에게 말하면 떠날 것 같아서 말을 못 했단다.
헤어지면 안 될까. 그렇게 물었다. 이미 마음이 떠난 거잖아. 많이 좋아해. 내가 잘할게. 세라는 말이 없었다. 그저 닭똥 같은 눈물만 떨굴 뿐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결국 세라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날 내내, 그리고 그날 이후에도. 영영 들을 수 없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학교 앞에서 세라를 다시 마주쳤다. 세라는 어떤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저게 남자친구일까. 속으로 생각했다. 세라도 나를 보고는 고개를 떨군다. 미안해서였을까. 부끄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어떤 감정이었을까. 지금까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