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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포리스트 Oct 19. 2018

신을 위한 변론

세상에 신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세상에 신이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종교가 필요가 있을까"


사회 문제를 이야기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물었다. 내게 그렇게 이야기 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일이 세상에 있을 것이냐고 누군가 나한테 묻더라. 일상을 돌아봐도, 사내에서 정치질 잘하고,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는 사람은 잘 사는데 말이다. 왜 어떤 사람은 비참하고 힘들게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힘들게 사냐고 물었다. 자신의 주변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문제를 피하기만 한다고.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이 힘들 때 신을 찾는다고. 인간이 만든 허상이 신이 아니냐고 물었다. 종교는 불필요하지 않냐고. 신을 증명할 수 없는데, 종교가 필요하냐 물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기독교인인 나는 정말 신을 믿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답변을 해주었다. 최소한 '한국교회가 말하는 식'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최소한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우리가 길거리에서 만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교회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오죽하면 '시끄러운 사람들'일까. 길거리를 가다가 교회이름이 적힌 휴지, 물티슈를 주면서 예수 믿으라는 식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신처럼 함부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약자들을 외면하고, 그저 힘든 것 얘기하러 교회에 가는.... 그런 신은, 그런 예수는 없다고 말이다. 


본래 종교는 하나의 철학이나 과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상이 자 신념을 함께 수행하는 '공동체'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이다. 예수 공동체가 고백헀던 신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도 같은 사람이라고 손 한 번 더 잡아주는 것이 일이라고 말이다. 어렵고 아픈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상한 맘을 어루만지는 공동체가 기독교 공동체의 기원이라 말해주었다. 예수는 그 시대 하층민이 아니라, 하층민조차 미워하는 사람들을 어루만졌던 그런 신이셨다. "너희는 죄인이야!"라고 윽박지르기 보다, "내가 너와 함께 할게"라고 말해주는 이가 예수셨다고 그렇게 설명했다.  예수 공동체는 그렇게 역사 속에 스며들었다.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절규하는 사람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며 성장했다. 한국에서도 나라잃은 슬픔에 힘들어 하는 이들을 어루만지기 위해 기독교가 왔다. 민주화, 노동운동 등에서 의를 위해 싸웠던 이들도 기독교인들이었다. 


신을 증명하는 길은 인간의 삶을 통해서다. 그런 신의 눈이 향하는 곳에, 우리 눈이 함께 가는 것이라고. 원래는 이 세상에 희망이 있냐며 절규하는 사람들, 정의롭게 살려다 곤란해진 이들이 함께 연대하는 공동체라고 말이다. 그런 신의 뜻, 신의 뜻대로 살았던 예수의 삶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본래 기독교고, 거기서 말하는 신은 그래야 한다고 했다. 

그런 종교가 이용되기 시작했다. 오롯이 성장만을 위한 곳으로, '실패한 사람'은 비아냥 거리는 곳으로, 사회소수자는 발붙이지 못하는 곳으로... 본래 종교가 가진 의미를 모두 잃어갔다. 어디가서 부끄러울 정도로 다른 이들에게 '믿기 힘든 신'을 안 믿으면 '구원 못받는다'는 헛소리를 하는 종교로 전락했다고 말이다. 아니, 그들은 이미 광기어린 눈으로 혐오를 조작하는 집단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신의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지, 신의 뜻은 인간의 상한 마음을 고치는 것이라고 믿어온 것이 종교라고 했다. 


신을 위한 변론은 어렵다만, 변론하지 않고도 힘든 세상이기에. 그렇다면 좋은 것이라며 변론을 긍정적으로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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