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별적 복지보다 보편적 복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10여년 전, 지체장애인인 내 가족의 장애인 주차스티커를 받게 됐을 때부터 알았다. 복지라는 게 공지나 이런 것이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후천적 장애인으로 장애등급을 받았지만, 주차스티커에 대한 안내를 받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가 알아 보시고, 스티커를 받으러 갔다. 하지만, 주차스티커의 대상임에도, 월권을 행사하던 한 시청 공무원의 월권으로 받지 못할 뻔했다. 주차스티커를 받으러 가던 날, 나는 갓 졸업한 24살의 대학생이었다. 내가 시청에 가서 주차스티커를 받으려고 하자, "경증 장애라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왜 안 되는지에 대해 묻자,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그가 말했다. 결국 법규를 들고갔지만, 그 공무원은 듣지 않았다. 결국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어서야 주차스티커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나를 비롯한 가족들이 당연하게 누려야 할 복지 혜택들을 국민신문고를 이용해 민원을 넣어서야만 받을 수 있는 이상한 일들을 몇 차례 겪었다. 규정만 보고 쉽게 해결될 일이 국민신문고나 국가인권위에 민원과 진정을 넣고서야 해결이 됐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서 마치 '프로고발러'처럼 되어버렸다. 주변에 지인들이 행정적으로 억울한 일이 있으면 내게 묻곤 한다. 물론 오해 하지 마시라. 모든 공무원들이 그렇지 않다. 민원인에게 잘해주고, 친절한 공무원들이 더 많다. 하지만, 간혹 이런 일들이 있었고, 이 문제는 늘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선별적 복지를 위해 '타인이 걸러내는 방식'이 있고, '자신이 신청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분들의 주장은 잘 알고 있다. 복지재원의 한계 때문에 취약계층을 먼저 지원하고, 점차적으로 늘리자는 것이다. 하지만, 2018년 아동수당 도입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군가를 걸러내는 것'에 대한 비용이 훨씬 더 클 수 있다. 복지제도를 누군가에게 '선별'하기 위해 들여야 할 사회적 시간과 비용을 고려치 않은 주장이다. 복지 사각지대는 그렇게 온다. 누군가를 '걸러내야만 하는 복지' 시스템에서는 정말 필요한 사람이 오히려 걸러질 위험이 있다.
누군가 그러더라. 가난한 사람이 복지혜택을 왜 받지 못하는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휴대폰 앱을 이용하여 복지제도를 신청하기 어렵고, 삶의 여유가 없어 동사무소에 갈 여유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 그들이 나의 사례에서처럼 간혹 '독특한 공무원'을 만나서 '자격이 되지 않으니 못받는다'고 하면 대부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 취약계층에게 국가인권위도, 국민신문고도,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소송구조도 모두 무의미한 일이다. 이용하는 방법을 누구도 알려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취약계층뿐 아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근로자들이 노동법 이용에서 소외되어 있다. 직장내 괴롭힘, 산업재해 , 연차수당, 성차별 및 성추행, 임금체불 등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경우가 주변에 많다. 당연하다. 우리는 그 언제도 이러한 것을 배운적이 없고,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도록 배운 적이 없다. 그런데, 동사무소를 갈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생기지 않는 취약계층은 오죽할까.
왜 보편적 복지를 해야 하냐 물으시다면, 복지정책에 대한 실효성 때문이다. 선별적 복지에 대한 정서가 정말 동사무소에 가기 어려운 그들이 먼저 지원받기 원하는지 때문인지,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사회에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