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 그립고... 죄송합니다
1983년의 여름, 나는 전북 이리를 떠나 충청도의 유성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버스가 지나치기만 해도 그 매연에 멀미를 하던 내가 통학버스를 30분이나 타고 등교를 해야하는 '유성여중'은 언덕위에 하얀 건물을 가진 학교였다.
학교까지의 진입로 초입에 버스의 종점이었던 그 곳은 학생들을 콩나물 시루처럼 꾹꾹 담아 실어나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시루에 매달린 가엾고 초라한 핏기없이 금방이라도 푹 쓰러질것 같은 소심한 여중생이었다. 엄청난 시달림으로 지각이라도 면할라치면 차멀미할 정신도 없이 어디든 넘어지지 않게끔 손으로 꽉 쥐고 매달려 학교까지 가야만 했다.
전학 첫날 부모님은 동행도 하지 않은 채 나는 건강기록부와 몇 가지 서류를 들고 전학지인 그곳 학교를 혼자 찾아가야만 했다. 그 땐 다 그랬다. 아무도 보살펴 주지 않아서 제 힘으로 눈치껏 버티고 살아 남아야 하는 그런 시절이었다.
교무실을 찾아 들어가니 모든 선생님들이 아침 조회로 다 들어가신 뒤라서 교무실은 몇 분의 나이 지긋한 선생님들만 남아계셨다. 아무도 긴장한 채 들어서는 조그마한 여학생은 눈여겨 보지 않았다.
저.... 오늘 전학 왔는데요....
모기 날개짓같이 웅얼대는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쳐다보신 한 선생님께서 나를 손짓으로 부르셨다.
유난히 하얀 피부에 푸르스름한 수염이 너무 도드라져서 한 걸음 나는 물러설뻔 했다. 눈은 마치 부처상의 가느다란 눈을 가진 그 선생님은 한 눈에 보기에도 진로소주의 트래이드 마크인 두꺼비가 연상되는 외모였다.
전학왔다고? 어디서 왔나? 어디보자....
긴장한데다 버스 후유증으로 속이 메스껍던 나는 선생님의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웠고, 급기야는 어지럼증상과 구토증 때문에 서있을 수가 없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시고 이것 저것 묻던 선생님께 황급히 화장실을 물어 뛰쳐나간 나는 첫 전학간 학교 건물이 울릴만큼 교사용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한바탕 하고 다시 들어왔다.
교무실에 다시 돌아왔을때는 내가 배정받은 반의 담임선생님께서 첫날부터 기운이 다빠진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찬물 대신 무엇인가 달달한 음료를 들고 와서 내게 건네 주신 그 두꺼비를 닮은 분은 한문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이 녀석이 전학첫날이라 오늘 긴장했나봐요. 잘 좀 챙겨주세요.
그 날 이후로 나는 그 한문 선생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스캔들에 시달리는 전학생이 되었고, 입심 쎈 애들은 말도 안되는 루머를 만들어 한문선생님을 음흉한 아저씨로 전락시켜버렸다. 또래에 비해 말수도 없고 조용한 나를 아마도 첫날의 기억으로 한문선생님은 많이 걱정되셨던 게 분명했는데 나는 그 분의 과한 애정이 너무도 부담스러워 한문 수업을 잘 하지 못했다.
매일 쪽지 시험으로 10개의 한자를 시험본 후 합격점 이하로 틀린 갯수대로 손바닥을 맞았는데.. 큰 매는 아니었지만 30센티미터 플라스틱 자로 선생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때리는 한문 선생님은 우리가 한자를 꼭 외우기 바라는 벌칙으로 때리는 시늉만 하는 그런 분이셨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인줄 알면서도 학교내에서의 한문선생님은 부처상의 가느다란 눈, 푸르스름한 수염과 작은키에 퉁퉁한 체격이 학생들 사이에 "진로 두꺼비" 로 불리면서 폭탄 취급받는 그런 스승이셨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한결같은 눈빛으로 항상 따뜻한 말만 해 주셨는데 솔직히 나는 참 못된 학생이었다. 나를 예뻐하시는 줄 뻔히 아니까 자꾸만 선생님을 피해다니고 한번도 좋은 응대도 해드리지 못한채 중학교를 졸업했다. 심지어 졸업식때 나를 찾아 기다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교무실로 가서 마지막 인사 조차 드리지 않고 학교를 떠났다.
그렇게 떠난 중학교는 깡그리 잊은 채 대학교 입학한 후에야 어느 날 문득 감동적인 스승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신문의 한 기사를 보면서 그 기사의 선생님과 너무도 닮은 중학교의 한문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 당시 방송가는 '참스승 찾기'가 붐처럼 일어나 지역 교육청에 전화를 하면 스승의 임직 학교를 알 수도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겨서 나는 용기를 내어 한문선생님의 거취를 찾아 몇 차례 전화를 시도했지만 성함을 알수없이 해당년도에 유성여중에 근무하신 정황만을 설명하면서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또한 찾는다는 스승님의 존함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제자 취급을 하며 퉁명스런 응대를 받은것도 사실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운좋게도 동창인 친구가 모교인 중학교 근처에서 아직도 살고 있어서 내가 한문 선생님을 수소문 중이란 말에 연락을 해 주었다.
금복주 선생님 작년에 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지... 아마...
친구도 역시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한문 선생님을 별명으로 기억하여 부르면서 덤덤하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했다. 순간 나는 귓속이 웅~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너무 뒤늦은 것에 대한 당혹감과 충격에서 잠깐 멍해졌다.
어느덧 불혹을 넘어선 중년이 되고보니 스승님이 주셨던 따뜻한 사랑을 우습게도 곡해했던 까칠하고 어리석은 10대의 어린시절이 죄스러움과 그리움으로 사무치게 가슴을 내리누른다.
선생님~ 너무 그립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