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쓸모있는 임시방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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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랬듯, 경기를 돌려보기 전에 평균 포지션과 액션 존을 확인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레알 마드리드 진영에서 공이 더 돌았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수비진에서 공을 많이 돌리며 기회를 본 것일까, 하고 찾아보니 소시에다드의 점유율이 훨씬 높고, 슈팅 숫자마저도 우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사실 토니 크로스라는 점유율 사기 캐릭터를 두고 있는 팀 입장에서는 꽤나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더욱 재미있던 부분은 호날두가 오늘은 사이드가 아닌 오로지 센터에만 위치를 잡고 있었다는 것인데, 저는 2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1. 호날두의 사이드 장악력이 떨어졌다는 뜻이고
2. 바스케스가 중앙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자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호날두는 더 이상 예전처럼 공을 몰고 진출할 수가 없습니다. 마르셀로가 합류할 때까지 공을 몰고 올라가서 사이드를 공략하거나, 중앙으로 진출해 기습슈팅을 날리거나, 적절한 시기에 맞춰 대각선으로 치고 들어가는 움직임은 속도에 기반한 것이기에 32세 호날두는 이런 움직임을 가져가기가 힘듭니다.
또한 바스케스는 출중한 드리블과 좋은 킥력을 가지고 있지만, 베일처럼 대각선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선수는 아니고, 피지컬로 버텨주며 중앙에서 찬스를 만들어내는 유형은 더더욱 못됩니다. 베일의 부재로 인해 호날두가 중앙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지요.
이런 전술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나초가 1인 2역을 해야 합니다. 나초의 수비력은 인정하지만, 공격력이 부족한 풀백이 1인 2역을 하기는 힘듭니다. 다행히 스피드가 어느 정도 되기에 힘든 역할을 해냈다고 보네요. 나초는 공 수 양면에서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역시 1인 2역에 한계가 있다는것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김병지 해설께서 지적하셨듯, 소시에다드는 대놓고 사이드만 팠으니까요.
나초를 지원하기 위해 토니가 아예 왼쪽에서 머물렀지만 커버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봅니다. 라모스와 바란이 잘 버텨줬고, 카세미루가 수비적으로 굉장한 공헌도를 보여줬기에, 사이드에서 중앙으로 들어가는 소시에다드의 공격 작업이 죄다 차단되었습니다. 카세미루와 센터백들이 오늘의 숨은 영웅이라고 보여집니다.
어쨌든 토니는 나초를 돕기 위해 주로 사이드에서 빌드업을 전개해야만 했었습니다. 이게 문제인 것이, 중앙에 비해 가져갈 수 있는 빌드업 선택지가 적습니다. 결국 원활한 공격전개를 위해 지단 감독이 몇가지 전술 변화를 줍니다.
1. 호날두와 벤제마가 내려오거나 등지는 플레이를 자주 합니다.
2. 크로스와 코바치치가 카세미루를 무시하고 드리블을 칩니다.
3. 수비수들이 다이렉트로 전방에 공을 전달합니다.
1번의 움직임이 있어 중앙에서는 공격을 비교적 원활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호날두는 공간을 잘 찾아다녔고, 벤제마도 미드필더와의 연계는 나쁘지 않았고요. 그 덕에 코바치치가 좀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공격시에는 카세미루가 조금 더 앞선으로 올라가되, 토니가 패스 외에도 활발한 드리블을 가져갔습니다. 코바치치 역시 드리블을 자주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선수 모두 카세미루가 패스를 받을 자리에 있었는데도 무시하고 앞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게 2번입니다.
카세미루가 패스 플레이에 기여하는 바가 적기에, 앞에 배치하여 소시에다드 선수들의 압박을 분산시키고, 두 선수가 직접 올라가는 방식으로 빌드업을 해결했습니다. 특히 소시에다드에게 2번이 정말 잘 먹혔었는데, 소시에다드 선수들의 피지컬이 좋지 않은 것을 잘 노린 선택으로 보여집니다.
1번째 골은 1번, 2번째 골은 2번 전술이 작용해서 나온 결과지요. 사이드에서 소시에다드가 수적 우위를 점했으나, 중앙에서의 수비 능력 부족으로 결정적인 찬스를 헌납했습니다. 사이드에서 시작하는 공격은 라모스와 바란이 잘 막아냈고, 소시에다드는 벤제마와 호날두의 기회창출을 막지 못했으니까요.
다만 벤제마와 호날두가 공이 없는 상태에서는 잘 움직여줬으나, 공을 달고 앞으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많은 실수를 범했습니다. 터치 이후의 굼뜬 동작으로 공을 어이없이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두 선수가 2~3년 전의 컨디션이었다면 결과는 3:0이 아니라 6:0~7:0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런 현상이 심해진다면 두 선수 모두 마드리드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두 선수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상한 상황은 아니지만, 어쨌든 롱런하기 위해서는 볼을 만지는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 뒤로는 예상했던 대로, 소시에다드가 교체를 2명을 하며 좀 더 활발하게 가져가려 하자, 모라타를 투입합니다. 모라타가 왜 선발로 뛰지 않는가, 왜 후반에만 뛰는가는 정말 쉽게 나오는 답인데, 벤제마가 모라타에 비해 많은 공격 옵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라타는 1번째 골장면처럼 등지고 적절하게 패스를 보내주거나, 호날두가 날뛸 수 있도록 위치를 잘 잡는 그런 선수는 아니에요.
모라타가 가진 장점은 활발한 수비가담과 윙어에 가까운 전진능력입니다. 실제로 들어가면서도 사이드로 많이 뛰고, 소시에다드가 라인을 올리려고 하면 어김없이 왼쪽만 골라 파댔습니다. 서로 체력이 없는 후반에는 이런 선수가 날뛰기 쉽습니다. 그 결과가 3:0이었지요.
전형적인 지단 감독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간 경기였습니다. 다만 공격진들의 활약이 눈에 띄지는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벤제마는 직접적으로 어시스트나 골을 넣은건 아니고, 공을 가진 상태에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으니까요. 하지만 벤제마의 오프 더 볼은 훌륭했습니다. 모라타에 비해 여전히 갖고 있는 옵션이 많은 선수이기에, 이번 시즌만큼은 계속 주전을 보장받으리라 봅니다.
그렇다고 경기 내용이 완벽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압박수비는 형편 없었어요.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패스 길목을 제대로 차단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호날두와 벤제마의 수비 이해도는 많이 떨어졌고요. 압박만 잘 작동했더라도 더 많은 찬스와, 사이드의 수비 강화를 이뤄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또 다른 위험 요인은 사이드 장악력입니다. 오늘 지단 감독은 호날두가 왼쪽에서 활약하는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나초는 꽤 빠른 풀백이지만, 본업이 센터백이기도 하고, 마르셀로처럼 전방에서도 공 안뺏기고 돌파를 할 수 있는 그런 풀백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카를로스나 카르바할처럼 엄청난 피지컬을 가진 선수는 더더욱 아니고요. 2대1의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왼쪽 사이드가 공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토니는 수비적으로 좋은 미드필더가 아니기에 강팀과의 경기에서는 이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팀들은 소시에다드처럼 중앙으로 진출을 못하지 않으니까요.
사이드 장악력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다닐루가 수비적인 안정감만 갖춘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해결해볼 수는 있습니다. 다닐루가 전진할 수 있으면 오른쪽에서 상대를 후벼파고, 상대의 시선을 돌릴 수가 있어요. 다만 다닐루는 수비 타이밍에 복귀하는 타이밍을 잘 못재고, 그래서 지단 감독이 오버래핑을 못하게 막아놨죠. 덕분에 오른쪽은 비교적 안정되었지만, 안그래도 약한 왼쪽은 더 많이 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닐루가 수비를 잘 하는 길은 골대에 고무줄로 묶어놓는 것 밖에 없는지 지단 감독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겁니다.
결국 중앙에 집중해서 승리를 따냈습니다만, 여전히 위험요소는 있습니다. 그래도 수비진의 컨디션이 개선된 것으로 보이는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라모스와 바란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더라면, 골은 골대로 먹히고, 오히려 우리가 사이드를 방어하는데만 시간을 낭비했을 거라고 봅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잘 짜여진 전술 보다는 선수들의 능력을 믿고 가는 전략적 판단에서 모든 선택이 나오는 거라, 꾸역승이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전술적 대안이 나온 것도 아니거든요. 최근 코파 델 레이 탈락은 시작부터 수비진의 기량 미달, 그리고 공격진의 폼 저하가 극명하게 드러나며 판 자체가 어그러진 경기들이었고요. 분명한 건 현재 상황이 꽤 위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만 마르카에서 언급했듯, 핀투스 코치가 겨울에 체력 훈련 강도를 높여서 일시적인 기량 저하가 올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체력 훈련이라는게 현재 체력을 희생해 미래의 체력을 일시적으로 끌어올리는 짓이니까요. 3월까지 무사히 버틸 수 있고, 로테이션 체계가 잘 돌아간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봄은 지칠대로 지친 선수들을 데리고 꾸려가는 시기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폭 넓게 교체를 했고, 체력 강화를 충분히 한 팀일수록 체력 우위를 바탕으로 더 많은 승점을 따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선수와 좋은 전술이 있더라도 체력이 없으면 망하는게 축구입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충분히 증명했지요. 그 시기까지 잘 버텨내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