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의 불평등한 무역 관계에서 벗어나려면?
요즘 일본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이 가하는 무역 위협에 대해서 한국 대법원이 내린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 판결에 대한 경제 보복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아마 요즘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질문거리는 일본의 수출 규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일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현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 비주얼라이징코리아의 분석 결과를 보자. 아래 비주얼라이제이션은 관세청의 수출입 무역통계 중 2002년부터 2019년 6월까지 일본과의 무역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이다. 각 원은 품목별 매년 무역수지를 나타내는데 주황색은 한국의 수출이 수입보다 적은 무역수지 적자, 초록색은 한국의 수출이 수입보다 많은 수역수지 흑자를 나타낸다. 원의 크기는 무역수지의 크기를 나타내며 크기가 클수록 적자나 흑자의 크기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첫 줄의 첫 번째 원이 주황색이고 그 크기가 크다는 점에 비추어 정밀기계의 2002년 무역수지가 적자였고 적자의 크기가 아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주황색 원이 초록색 원보다 많이 보인다. 즉, 2002년부터 현재까지 무역수지 흑자보다는 적자를 기록한 품목이 더 많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품목과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품목이다. 흑자를 기록한 제품들은 대부분 수산물, 의류, 농산물 등의 소비재인 반면에 한국이 적자(일본이 흑자)를 기록한 제품들은 기계, 정밀기계, 화합물 등 대부분이 자본재이다. 대체 소비재와 자본재가 무엇이길래 이러한 차이가 중요한 걸까?
예를 들어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공장을 세운다고 해보자. 무엇이 필요할까? 공장을 세울 땅, 일하는 사람, 그리고 스마트폰을 만드는 기계가 필요하다. 스마트폰을 만드는 기계나 장치들은 자본재의 일종이다. 그리고 자본재를 활용해서 생산하는 스마트폰은 소비재라고 한다. 정리하면, 자본재는 기계처럼 제품 생산에 사용되는 재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경제학에서는 앞서 얘기한 토지, 노동과 함께 자본재를 생산의 필수 삼요소 중 하나로 본다. 따라서 어떤 기업이든지 생산을 하려면 생산의 필수요소인 자본재를 확보해야 한다. 자본재를 싼 가격에 확보할 수 있으면 그만큼 투자도 많이 하고 기업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자본재를 비싼 가격에 사야 한다면 기업 운영에 차질을 빚게 된다.
자본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자본재는 자본재 생산에 비교우위를 갖는 10개국에 전 세계의 자본재 생산 80%가 집중되어있다.
자본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자본재는 자본재 생산에 비교우위를 갖는 국가들에서만 생산이 되고, 전 세계의 자본재 생산 80%가 10개국에 집중되어있다. 자본재 생산에 비교우위를 가진다는 것은 자본재를 생산할 수 있는 생산 체계와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고 자본재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본재에 비교우위가 없는 경제체제의 기업들은 자본재 비교우위를 갖는 국가들로부터 자본재를 수입하게 된다. 하지만 자본재를 수입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자본재에 비교우위가 없는 국가들은 자본재는 수입하되 대신 비교우위를 갖는 다른 제품 생산에 집중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스마트폰을 만드는 기계는 수입하는 대신 스마트폰 생산에 집중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과의 무역 관계는 이러한 모델에 기초한다. 한국이 자본재에서 무역 적자를 보인다는 결과는 곧 자본재에 있어 일본이 비교우위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한국이 무역 흑자를 보이는 소비재에서는 한국이 일본에 비해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과 일본의 무역 관계에서 한국이 일본에서 자본재를 수입해서 소비재를 생산하고 일본에 수출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 모두 비교우위를 갖는 제품을 수출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 이득을 볼 수 있다.
자본재는 일본에서 수입하고 한국이 비교우위를 갖는 소비재 생산에 집중함으로써 한국 역시 이득을 얻는다. 하지만 이 관계의 우위에 있는 것은 일본이다.
하지만 이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것은 일본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자본재는 생산의 필수 요소이다. 그런데 필수 요소의 가격이 올라간다? 그러면 당연히 기업들은 회사 운영에 타격을 받게 된다. 한일관계에서 자본재의 비교우위가 일본에 있고, 자본재는 소비재 생산의 필수적인 전제 요건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일본이 한국 경제를 좌우할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다. 만약 한국이 일본에 소비재를 판매하지 않거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처럼 일본 소비재를 소비하지 않는다면, 한국에 적을 둔 일본 기업들 일부가 손해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에 자본재를 수출하지 않으면 한국 기업들은 필수요소 없이 제품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 수출을 포함한 한국의 수출 사업 전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조치는 바로 이런 선 상에 있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함으로써 한국 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험을 간파한 것이다.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조치는 바로 이런 선 상에 있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함으로써 한국 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험을 간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한국에서는 이미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시작되었고, 정계에서도 여러 선택지들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은 미봉책에 그칠 수도 있다. 일례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은 일본 기업에게는 분명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답을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한국이 일본 소비재를 사지 않으면 한국에 적을 둔 일본 기업 일부가 손해를 입겠지만, 일본이 한국에 자본재 수출을 중지하면 한국의 수출 사업 전체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해결책이 제대로 된 효과를 가지려면 한국 경제 체제에 대해 보다 전략적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특히 한국 기업의 일본 자본재 의존도를 줄이는 방향이어야 한다.
최근 한국 정부가 발표한 정책은 이러한 맥락에 있다. 향후 5년 동안 자본재를 직접 생산할 수 있도록 연구 개발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또한 세금 공제 등 금융 혜택을 제공해서 기업들이 자본재 생산에 더욱 투자할 수 있도록 도모하겠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문제가 한 가지 있다.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비교우위가 없는 국가에서 자본재를 직접 생산하고자 할 때 전체 경제에 비효율성이 초래될 수도 있다. 돈이나 노동과 같은 중요 자원을 자본재 생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작 한국이 비교우위를 갖고 수익을 내는 제품 생산에는 예전보다 적은 자원을 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전체 경제 성과가 줄어들 수도 있다.
연구개발에 투자를 많이 하는 것은 좋은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본재에 비교우위를 갖추어나갈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은 자본재에 비교우위를 이미 가지고 있는 국가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아래 비주얼라이징코리아의 분석 결과에서 자본재에 비교우위를 갖는 첫 번째 줄의 국가들(일본, 독일, 프랑스)은 모두 조정시장경제(CMEs: Coordinated Market Economies)에 속한다. 이외에 조정시장경제로 분류되는 네덜란드, 스위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 역시 분석 결과에서 모두 한국에 비해 자본재 무역수지 흑자를 나타냈다(이들의 분석 결과는 그 규모가 작아 아래 비주얼라이제이션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자본재 우위를 갖는 국가들이 공유하는 조정시장경제의 특징들은 이들 국가가 자본재에 비교우위를 획득할 수 있게 한 제도적인 요소들이다.
한국에 비해 자본재에 비교우위를 갖는 국가들은 모두 조정시장경제(CMEs: Coordinated Market Economies)에 속한다.
조정시장경제의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1) 힘 있는 노동조합, 2) 노동조합과 고용주 간의 협력적인 관계, 3) 임금 단체 교섭, 4) 실업급여를 포함한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안전망이 있다. 현재 한국 경제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일례로 한국 노동조합은 고소득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나 세력이 약하다.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s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국가들 중 최하위이고, 노동조합은 보통 기업이나 국가의 협력자이기보다는 적대자로 여겨진다. 임금 수준도 개별 기업에서 개별 협상을 통해 결정되며 임금 수준이 전체 산업에 걸쳐 공통되는 임금 단체 교섭과는 반대된다. 또한 상대적으로 노동시장의 규제가 많은 조정시장경제에 비해 최근 한국 정부의 자본재 비교우위 획득 정책은 노동시장의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을 취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사회적 안전망의 보장 범위 역시 상대적으로 낮다(관련 기사 링크: 영어/한국어).
한국이 일본과의 무역 관계에서 우위에 서고자 한다면 단순히 투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재 생산을 가능하게 한 제도적인 요소들도 전략적으로 생각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전체 경제를 단기간에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을 기회로 삼아서 지속적인 변화(incremental innovation: 시장조정경제에서 나타나는 혁신이 혁신을 이끌어내는 혁신)를 이끌어낼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길의 초입을 닦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오랜 시간을 들이는 만큼 그 결과도 오래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