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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ka Jan 30. 2022

사실은 귀찮아서 결혼했는데

모두의 배려와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엄마가 누나 생일 때문에 왔다가 그 다음주 설에도 또 와야하면 당신 힘들지 않겠냐는데, 괜찮겠어? 어때?"

"엥? 뭐 어때~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번 년도는 언니(남편의 누나 - 시누이) 생일이 있는 바로 다음 주가 설이다. 남편이 시댁에 내려가는 일정에 대해 시어머님과 통화를 했나보다. 2주 연달아 와야하는데 괜찮겠냐는 시어머님의 물음에 내 대답은 '아무렇지 않은데요?' 였다. 대답도 그렇게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 뭐 전라도 경상도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뭐가 문제람? 라는 생각이 지나갈 찰나, 올챙이 시절이 떠올랐다. 그렇다, 우리는 시댁에 방문하는 횟수를 가지고 파혼(!)할 뻔한 경험이 있는 커플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2018년 연말 어느날, 아직 박사과정중에 있던 오빠와 나는 서초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보고 와인을 한 잔 한다. 결혼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신혼집이며, 집안일 배분이며, 재정관리 등 많은 이야기와 결정들을 쌓아왔다. 그 중에 우리가 가장 크게 부딪힌 문제는 첫번째로 부모님 용돈, 두번째로 양가 부모님 댁에 방문하는 횟수였다.


남편과 내가 자라온 환경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것 빼곤 거의 모든 게 반대였다. 나는 굉장히 독립적으로, 반항적으로 자랐고 남편은 의존적이라 할 순 없지만 순종적이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온 사람이다. 대학 때도 나는 명절이나 가족행사가 있을 때만 집에 내려갔지만 남편은 시험기간이 아닌 이상 2주, 늦어도 3주에 한 번은 꼭 집에 내려갔다.

"오빠는 집에 왜 그렇게 자주가? 내 친구들은 나랑 비슷한데. 다들 명절이나 가족행사 있을 때만 가~"

"그래? 이상하네. 내 친구들은 나만큼 자주 가던데. 한달에 거의 2-3번?"

의심이 많은 나로서는 그 당시에 오빠 고향에 숨겨둔 여자라도 있는건 아닌가하는 해괴망측한 상상도 몇 번 했었다.


부모님 용돈 문제는 둘째치고 부모님 댁에 방문하는 횟수에 대한 문제가 결국 불거졌다. 남편은 본인이 혼자 살 때처럼 2-3주에 한 번은 부모님 댁에 방문하고 싶다고 했고 그건 시댁뿐 아니라 내 친정에도 똑같을 거라고 했다. 내 입장에서 그건 터무니없이 많았다. 그럼 한 달에 거의 모든 주말을 양가 부모님댁에 돌아가며 방문하느라고 써야한다는 얘긴데?


의견이 좁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말 절망스럽고 슬펐던 이유는 내가 한 가정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빼앗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독립적으로 자란 건 오로지 나만의 사정인 거니까. 이런 고민과 충돌이 거듭되면서 '내가 따뜻하고 가정적인 한 집안을 삭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갈수록 강해졌다. 결국 캐롤이 울려퍼지고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한 와인바의 유리창을 보며 나는 엉엉 울었다.

"나는 오빠랑 결혼해봤자 오빠네 가족이랑 오빠를 떨어뜨려놓는 역할 밖엔 못할거야. 사실 누가 봐도 부모님께 잘하려는 오빠가 맞는 거고 옳은 건데, 난 그걸 못하겠어. 몇십년을 주말내내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살면 정말이지, 너무 우울할 것 같아. 그냥 우린 결혼하면 안되나봐. 으어어엉엉엉엉엉. 여기서 끝내든지 평생 연애만 하든지 해 우리. 엉엉엉엉"


끓어오르는 감정에 북받쳐 쉴새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나를 달래느라 오빠는 아무 말이나 했다.

"알았어, 알았어. 연애만 해. 괜찮아. 마흔 넘어까지 연애만 해도 되니까, 뚝 해봐 뚝."

마음이 여린 오빠는 나를 위로하다가 결국 본인도 같이 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막차 시간이 다가왔고, 우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혹은 내리지 않은채 헤어졌다.




그렇게 2019년의 해가 밝았고 9년째 만나오던 우리를 향해 주위에서는 늘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하는데?"

양가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니네는 그렇게 오래 만났으면서 결혼안하고 나이만 먹을거니?"

"둘이 살림을 합치는게 경제적으로도 훨씬 이득이야. 돈이 없으면 식올리지말고 단칸 월세방이라도 구해서 같이 살아."


문제는 우리였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꿋꿋이 '우린 연애만 하다 늙어죽을거예요!' 라고 외치면 되는 건데 그럴 심지가 부족했다. 답변과 결정을 내려야할 질문이 여전히 우리를 성가시게 했지만, 그보다 우리를 더욱 성가시게 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데이트. 우리에게 데이트는 너무나 지치고 귀찮은 일이었다. 토요일 아침이 되면 씻고 준비하고 치장하고 밥먹을 곳과 즐길 곳을 찾아 헤매야했다. 통상 그런 곳은 늘 사람이 많았고 사람에 치이는 걸 너무나도 싫어하는 우리는 '그냥 같이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엄마 말대로 그냥 동거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유교보이다. 본인은 혼인신고없이 같이 사는 일은 절대 없다며 못박았다.


그 해 겨울, 우리는 결국 '부모님 댁에 몇 번이나 갈 것인가'라는 안건에 대해 '한 달에 한 번정도'라는 잠정결론을 내린채 혼인신고를 해버렸다. 부모님 댁에 한 달에 한 번 가는 것보다 매주 데이트를 해야하는게 우리에겐 더 치명적이고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구청 방문을 평일에 해야했기 때문에 출근이 비교적 자유로운 내가 혼자가서 후루룩 하고왔다. 이렇게 쉽게 혼인신고가 끝나다니!


그렇게 방문하게 된 시댁은 쉽지 않았다. 시댁에 가는 날 아침이면 정말 거짓말을 하나도 보태지 않고 몸이 아팠다. 누가봐도 꾀병이라 할테지만, 아무튼 여기저기 아팠다. 가는 길엔 유독 멀미도 많이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기분도 좋을리 없었고, 우리가 싸우는 순간은 유일하게 시댁가는 날이었다. 가끔 뉴스를 보시며 거칠게 말씀하시는 아버님을 외면하고 싶었고 별 거 아닌 문제로 어머님과 부딪히실 땐 정말 가시방석이 엉덩이에 달라붙은 것 같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우리집 분위기와 상당히 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누구 한 명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도 없었고, 1분도 사운드가 비지 않는 우리집에 비하면 적막이나 TV소리가 흐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조언을 하실 때도 '결정은 니네가 해라, 그렇지만 내가 볼 땐 이러이러하다' 라고만 말씀하실 뿐이었는데, 항상 강제에 가까운 권유와 잔소리 폭탄을 받아왔던 나로서는 정말 신기한 분위기였다. 또, 물건들이 자유분방하게 널려(?)있는 우리집과는 달리 시댁은 항상 반짝반짝,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정돈되어 있었다. 어머님이 매 끼 차려주시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식사는 30년 동안 한 번도 집에서 겪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 엄마는 실험적인 - 때로는 파괴적인 - 요리를 좋아하고 정통 한식이나 밑반찬 만드는 데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


1남 1녀인 덕분에, 그리고 남편의 누나도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부모님 두 분 모두 시집살이에 대해서는 조심하려고 경계하고 계신듯 했다. 음식 준비라도 도와드릴라치면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냥 쉬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고, 내 음식 취향을 항상 신경써주셨다. 평생을 쌈무와 쌈장없이 고기를 구워먹던 집인데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두가지를 꼭 준비하셨고, 내가 잘 안먹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자주 즐겨드시던 해산물을 식탁에서 치우셨다.


그렇게 시댁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하나둘 쌓여갔고, 그 사이엔 두 번의 김장과 두 번의 명절이 지나갔다. 언니는 아이를 낳았고 외할아버지가 된 아버님은 처음보는 너털웃음과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을 자주 보여주셨으며, 갈수록 온화해지셨다. 나는 시어머님을 엄니라고 부르고, 서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게됐다. '시댁'은 더이상 무섭고 불편한 공간이 아니었고, 그걸 넘어서 이제는 시댁에 가는 날이 기다려질 때도 있다.


늘 표현이 풍부하신 소녀같은 어머님




이러한 모든 사연들 끝에 요즘은 시댁에 가는 것이 정말 아무렇지가 않다. 어머님이 오빠에게 "2주 내내 와야하는데 진아가 힘들지 않겠니?"라고 물어보셨다고 전해왔을 때, 나는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이 모든 과거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되려 그런 질문을 왜 하셨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모두의 노력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툴툴거리면서도 꾸역꾸역 시댁에 갔던 나의 노력이 가장 작은 것일거다. 그런 나를 달래고 어르고 온갖 비위를 맞춰주던 남편의 노력이 그보다 좀 더 컸겠지. 그리고 나를 '일꾼'이 아니라 '손님'으로 맞아주신 시부모님과 언니의 노력이 가장 컸을 것이다.


우리의 뜨거운 감자에 대해 제대로 된 합의에 이르지 못한채, 순전히 데이트가 귀찮아 결혼해버린 것 치고는 이 정도면 결과가 괜찮다. 요즘도 주말 내내 집에서 뒹굴거릴 때면 둘이 잠옷바람으로 낄낄거리며 말하곤 한다.

"결혼 안했으면 어쩔뻔했어. 밖에서 사람에 치이고 있을 뻔 했잖아."

"어우~ 화장하고 옷차려입는데만 한시간이야. 생각만해도 귀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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