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놀면 잘하는데..
신뢰는 좋은 것이다.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아마도?
나는 선진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내가 자부하는 건 아니다. 아무튼 회사는 모든 것이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창한다. 대표적인 예가 근태관리다. 신뢰를 바탕으로 유연근무제를 운영하고 있고 어디에도 출퇴근시간을 기록하는 곳은 없다. (물론 CCTV를 돌려보면 나오겠지만 뭐 그렇게까지 할 여력은 없을거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속해 있는 조직의 분위기를 닮아갈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대체로 근로시간이 주 40시간이기 때문에 점심시간을 포함해 하루에 적어도 아홉시간을 몸담고 있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나도 '신뢰'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가치이고 언제나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것이라는 사실에 세뇌 아닌 세뇌를 당했다. 이 가치를 다른 어떤 조직도 아닌 사기업에서 얘기하고 있기때문에 업무의 성과로 이어지는 팀워크에도 좋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의심은 다름아닌 게임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작년부터 취미삼아 하는 게임이 있다. 최근에 좀 뜸하다가 다시 시작했는데 바로 브롤스타즈라는 모바일 게임이다. 3대3으로 팀을 나눠서 작은 미니 게임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다.
게임 시작하기 버튼을 누르면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이 랜덤으로 배정되고 그 안에서 또 랜덤으로 세 명 씩 한팀이 된다. 닉네임에 한국어도 있고 일본어도 있고 중국어도 있고 러시아어도 있다. 그러니까 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든지 나와 한 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게임이 잘 되는 때
이렇게 얼굴도 국적도 모르는 사람과 팀을 이루어서 게임을 하다 보면 어쩐지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 주위를 잘 살펴보며 게임에 임하게 된다. 우리 팀 멤버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아닌지 혹시 상대편 멤버에게 죽어라 처맞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내가 가서 조금만 보태주면 게임을 승리로 이끌 찬스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유심히 지켜 보게 된다.
이건 마치 팀원을 돌봐주는(?) 것도 같지만 사실은 충분한 신뢰가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같이 뛰는 쟤를 신뢰하지 못하니 한 번 더 지켜보게 되고 달려가서 지원하기도 하고 하는 거다.
이런 경우에는 멋진 팀워크가 형성된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엔 마음이 잘 맞는 멤버들을 만나면 같은 멤버와 게임을 다시 할 수 있는 옵션을 눌러서 최소 다섯 판에서 많게는 열판이 넘게까지도 쭉 함께 한다.
마음이 맞는 팀원들을 만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의외로 좋은 팀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니네랑 하면 꼭 게임이 안돼
그런데 이상하게도 친한 오빠들과 함께 게임을 할 때는 팀워크가 생각만큼 좋지 않다. 도대체 왜 각자 잘 뛰는 애들이 모여 이렇게 말아먹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니 생각을 한다기보다는 분석을 해보니 내가 이 사람들과 게임을 할 때는 전혀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속 편하게 하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서로의 능력치를 믿고 있다보니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잘 하겠지, 내가 서포트를 가지 않아도 잘 살아 돌아오겠지, 내가 굳이 제대로 못해도 알아서 와서 나를 서포트 해 주겠지, 라는 무한 신뢰가 친밀함에 더해져 과도하게 형성된 것이다.
게임이 잘 되다가 안 될 때
이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랜덤으로 짜여졌음에도 승승장구하던 팀이 갈수록 패배를 잦게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멤버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에게 민폐가 되지 않으려고, 혹은 우리 팀원이 잘 하고 있을지 신뢰가 되지 않아서 사방을 둘러보며 게임에 임한다. 그런데 게임의 횟수를 거듭할수록 서로가 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생겨버려서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하지 않아도 나머지 둘이 잘 해주겠지 하는 생각이 어느 순간 스며드는 것이다.
물론 승률이 오름에 따라서 게임이 매칭해주는 상대방의 난이도가 더 높아질 수도 있긴 하겠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에서 각 캐릭터가 대처하는 순발력이나 행동들을 보았을 때 같은 멤버와 게임을 거듭할수록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건 어느정도 자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결국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때로는 개인의 나태함을 혹은 개인의 낮은 성과를,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낮은 팀워크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궤변이 탄생한다.
일이 잘 되려면
현재 내가 속한 팀(회사 안에서의 팀) 안에서 모두가 조금씩 기여해야만 하는 프로젝트의 상황을 볼 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만약 서로가 굉장히 친하고 굉장히 신뢰한다면, 모두가 모두의 몫을 빠짐없이 아주 꼼꼼하게 잘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면, 각자의 일에 대하여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봐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빈 부분들은 계속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탑이 우르르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엔 중도를 지키는 것
공동의 목표를 함께 달성해나가는 데 있어 과도한 신뢰는 서로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알아서 잘하겠지. 나만 잘하면 돼"
그렇다고 아예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몹시 혹독한 세상이 될것이다.
"쟤가 절대 제대로 해놨을리가 없어. 일일이 다 까보자"
말이 혹독한 세상이지 개인의 사기가 떨어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조직보다 훠얼씬 못한 조직이 될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중도' 아닐까.
기본적으로는 신뢰를 하되 가끔은 의심도 하면서, 상대가 잘 달리고 있는지, 그만큼 나도 잘 달리고 있는지 봐가면서.
100프로 의존도 100프로 독립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딘가에 균형을 잘 맞추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