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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ka Sep 10. 2019

도대체 니네랑 하면 게임이 안돼

따로 놀면 잘하는데..

신뢰는 좋은 것이다.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아마도?


나는 선진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내가 자부하는 건 아니다. 아무튼 회사는 모든 것이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창한다. 대표적인 예가 근태관리다. 신뢰를 바탕으로 유연근무제를 운영하고 있고 어디에도 출퇴근시간을 기록하는 곳은 없다. (물론 CCTV를 돌려보면 나오겠지만 뭐 그렇게까지 할 여력은 없을거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속해 있는 조직의 분위기를 닮아갈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대체로 근로시간이 주 40시간이기 때문에 점심시간을 포함해 하루에 적어도 아홉시간을 몸담고 있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나도 '신뢰'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가치이고 언제나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것이라는 사실에 세뇌 아닌 세뇌를 당했다. 이 가치를 다른 어떤 조직도 아닌 사기업에서 얘기하고 있기때문에 업무의 성과로 이어지는 팀워크에도 좋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의심은 다름아닌 게임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작년부터 취미삼아 하는 게임이 있다. 최근에 좀 뜸하다가 다시 시작했는데 바로 브롤스타즈라는 모바일 게임이다. 3대3으로 팀을 나눠서 작은 미니 게임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다.


게임 시작하기 버튼을 누르면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이 랜덤으로 배정되고 그 안에서 또 랜덤으로 세 명 씩 한팀이 된다. 닉네임에 한국어도 있고 일본어도 있고 중국어도 있고 러시아어도 있다. 그러니까 국적을 불문하고 누구든지 나와 한 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브롤 PPL아님


게임이 잘 되는 때

이렇게 얼굴도 국적도 모르는 사람과 팀을 이루어서 게임을 하다 보면 어쩐지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 주위를 잘 살펴보며 게임에 임하게 된다. 우리 팀 멤버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아닌지 혹시 상대편 멤버에게 죽어라 처맞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내가 가서 조금만 보태주면 게임을 승리로 이끌 찬스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유심히 지켜 보게 된다.


이건 마치 팀원을 돌봐주는(?) 것도 같지만 사실은 충분한 신뢰가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같이 뛰는 쟤를 신뢰하지 못하니 한 번 더 지켜보게 되고 달려가서 지원하기도 하고 하는 거다.


이런 경우에는 멋진 팀워크가 형된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마음이 잘 맞는 멤버들을 만나면 같은 멤버와 게임을 다시 할 수 있는 옵션을 눌러서 최소 다섯 판에서 많게는 열판이 넘게까지도 쭉 함께 한다.


마음이 맞는 팀원들을 만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의외로 좋은 팀원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우리팀이 별을 무려 9개나 더 모은 상태로 게임이 끝난 상황, 나이쓰!!
우리 좋았잖아 Exit 말고 Play again 눌러줘 어서..


니네랑 하면 꼭 게임이 안돼

그런데 이상하게도 친한 오빠들과 함께 게임을 할 때는 팀워크가 생각만큼 좋지 않다. 도대체 왜 각자 잘 뛰는 애들이 모여 이렇게 말아먹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니 생각을 한다기보다는 분석을 해보니 내가 이 사람들과 게임을 할 때는 전혀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속 편하게 하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서로의 능력치를 믿고 있다보니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잘 하겠지, 내가 서포트를 가지 않아도 잘 살아 돌아오겠지, 내가 굳이 제대로 못해도 알아서 와서 나를 서포트 해 주겠지, 라는 무한 신뢰가 친밀함에 더해져 과도하게 형성된 것이다.


그래!! 우리가 오지게 지는 이유는 서로를 너무 믿어서야!! (p.c 애독자 블라블라님)


게임이 잘 되다가 안 될 때

이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랜덤으로 짜여졌음에도 승승장구하던 팀이 갈수록 패배를 잦게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멤버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에게 민폐가 되지 않으려고, 혹은 우리 팀원이 잘 하고 있을지 신뢰가 되지 않아서 사방을 둘러보며 게임에 임한다. 그런데 게임의 횟수를 거듭할수록 서로가 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생겨버려서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하지 않아도 나머지 둘이 잘 해주겠지 하는 생각이 어느 순간 스며드는 것이다.


물론 승률이 오름에 따라서 게임이 매칭해주는 상대방의 난이도가 더 높아질 수도 있긴 하겠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에서 각 캐릭터가 대처하는 순발력이나 행동들을 보았을 때 같은 멤버와 게임을 거듭할수록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건 어느정도 자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결국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때로는 개인의 나태함을 혹은 개인의 낮은 성과를,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낮은 팀워크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궤변이 탄생한다.



일이 잘 되려면

현재 내가 속한 팀(회사 안에서의 팀) 안에서 모두가 조금씩 기여해야만 하는 프로젝트의 상황을 볼 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만약 서로가 굉장히 친하고 굉장히 신뢰한다면, 모두가 모두의 몫을 빠짐없이 아주 꼼꼼하게 잘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면, 각자의 일에 대하여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봐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빈 부분들은 계속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탑이 우르르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엔 중도를 지키는 것

공동의 목표를 함께 달성해나가는 데 있어 과도한 신뢰는 서로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알아서 잘하겠지. 나만 잘하면 돼"


그렇다고 아예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몹시 혹독한 세상이 될것이다.

"쟤가 절대 제대로 해놨을리가 없어. 일일이 다 까보자"

말이 혹독한 세상이지 개인의 사기가 떨어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조직보다 훠얼씬 못한 조직이 될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중도' 아닐까.


기본적으로는 신뢰를 하되 가끔은 의심도 하면서, 상대가 잘 달리고 있는지, 그만큼 나도 잘 달리고 있는지 봐가면서.


100프로 의존도 100프로 독립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딘가에 균형을 잘 맞추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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