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교과서나 참고서가 없었다. 그저 xx 년도 예상문제집과 두껍게 제본된 지난 10년 치 기출문제집 뿐이었다. 8시부터 9시까지는 자습시간이었고 9시가 되면 하루에 담배를 두 갑은 거뜬히 태우실 것 같이 온몸이 담배냄새로 뒤덮인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수백 개의 문제를 해설해 주셨다.
검정고시는 높은 점수를 받을 필요가 없고 그저 전 과목 60점 이상만 맞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내 목표는 전 과목 60점 넘기였다. 영어는 문법을 배운 적이 없어 그냥 말이 될법한 답을 찍으면 됐고, 독일어는 호주에서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과감히 버렸다. 문제는 수학, 과학, 사회 등 기타 과목이었는데 선생님은 그냥 A 같은 문제에는 A 같은 답을 고르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왜’를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냥 기계처럼 답을 표기하고 채점하기만 반복했다.
두 달 동안 10년 치 기출문제를 두 바퀴 정도 풀었다. 몇 천 개, 몇 만개에 달하는 문제를 풀다 보니 이상하게 상식이 쌓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왕들, 역대 대통령의 이름 등… 조금씩 자주 보던 전문용어(?)들이 조금씩 눈에 익었고 100% 정확도는 아니지만 찍을 수 있을 정도의 감이 생겼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4월이 되고 우리 반 사람들은 다 함께 고사장으로 향했다. 랜덤배정된 교실로 흩어지며 미선 이모는 두 팔로 파이팅 제스처를 보여주셨고, 성철이는 턱을 치켜세우며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여주며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지정된 자리에 앉자 그동안 같은 문제를 열 번도 넘게 설명해 주던 같은 반 친구들이 떠올랐다. 특히 수학 같은 과목은 선생님이 설명을 자세히 해주지도 않았고, 내가 워낙 기초가 없어서 그들이 내게 쉬는 시간마다 달려와서 알 때까지 설명해 주던 모습이 생각났다. 물론 설명과 함께 애정 어린 욕도 배부르게 먹었고.
시험을 마치고 우리는 근처 카페에 다 함께 모였다. 미선이모가 시험 한 달 전부터 시험 당일에는 마지막으로 맥심 말고 진짜 커피 한 잔 하고 헤어지자고 하셨던 날이었기에.
“성철이 너는 담배 좀 그만 피우고. 그러다 중국집 사장님 되기 전에 큰일 나겠다. 수연이는 엄마 말씀 잘 듣고 꼭 헤어디자이너 되렴. 진아는 욕 좀 줄여. 너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라고. 희민이는 간호학과 가서 예쁜 여자친구 꼭 사귀고. 그리고 새록이는… 엄마한테 효도해. 잘 살아.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리는 게 효도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