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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Apr 19. 2023

39. 사연 없는 사람 없다

한길 물속은 알아도...

엄마는 매일 아침식사를 준비해 주시고 도시락을 싸주셨다. 어쩌면 고3을 둔 엄마의 마음이셨을지도 모르겠다. 4월에 있을 시험까지는 고작 두 달뿐이었지만 우리는 두 달 이상 학원을 다닐 돈이 없었고 무조건 4월에 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직 한기가 만연한 2월의 새벽공기는 몸이 떨리게 추웠지만 매일 7시에 집을 나서야 8시까지 신설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여느 고등학생들처럼 매일 책가방과 도시락 가방을 들고 학원으로 갔다.

추위 속 뿌연 입김을 가르고 학원에 도착하면 항상 먼저 와계셨던 미선이모가 맥심과 종이컵을 하나씩 손에 쥐어주셨다. 맥심을 컵에 쏟아붓고 복도에 있는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맥심봉투로 휘휘 저어 잘 섞인 커피를 두 손에 쥐고 자리에 앉으면 얼어있던 몸이 단숨에 녹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등록한 [문제풀이반]에는 고작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학생들이라고 보긴 어려운 모습의 학생들이었다. 유일하게 착실한 학생 같아 보였던 남학생 한 명이 있었을 뿐. 아, 나 역시 색안경을 끼고 봤던 것일 수도 있겠다.

미선이모는 엄마 또래의 아줌마였다. 그녀는 어릴 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공단에 취직해서 공장일을 쭉 해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고 했다. 그러느라 그녀 자신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중년의 나이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일을 하다 조금 모인 돈으로 중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고졸 검정고시까지 준비했던 것이다. 왠지 케케묵은 보릿고개 시절의 이야기 같았지만 세상이 변해도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은 늘 있었다.

항상 나와 2,3등 도착을 겨루었던 희민이라는 남자아이는 고1에 자퇴를 했다고 했다. 이유는 학교폭력이었다. 그의 작고 왜소한 체구도 분명 한몫을 했으리라. 덥수룩한 머리에 까만 뿔테안경을 끼고 있던 그 아이는 반에서 가장 똑똑한 친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고1까지는 착실하게 학교를 다닌, 우리 중에는 가장 가방끈이 긴 아이였으니까. 희민이는 검정고시를 보고 나면 간호학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쯤 그는 어딘가에서 간호사가 되었으려나.

진아라는 여자아이는 부스스한 새빨간 파마머리에 그 한겨울에도 삼선슬리퍼를 신고 학원에 오던 독특한 아이였다. 모든 문장에 욕이 들어있거나 욕으로 끝나지 않으면 다리라도 떨어야 한다고 말 하는 친구였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도 학교에서 일진이었던 것을 꽤나 부끄럽게 생각했고 그래서 희민이한테 짓궂게 굴면서도 둘은 맨날 컵라면을 함께 먹는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진아는 학교 선생이 ‘그지 같아서’ 학교를 때려치웠다고 했다. 홧김에 자퇴를 했는데 결국 패자는 자신이었다고 했다. 끝까지 버텨서 그 선생이 골로 가는 꼴을 봤어야 했다고. 그래서 자신은 꼭 검정고시 합격증을 그 선생 면전에 던져주러 가야 한다고 했다.


문신으로 팔이며 다리며 목덜미며 몸에 빈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던 성철이는 노오란 탈색머리를 하고 그 한겨울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오던 남학생이었다. 항상 오전에만 오고 오후에는 휘리릭 나가버리던 그는 알고 보니 짜장면과 치킨배달을 하며 학원비를 벌고 있었다. 원래 매주 이 학원에 짜장면 배달을 왔는데 학원 선생님이 성철이에게 짜장면을 배달하는 사람 말고 짜장면을 시켜 먹는 사람이 되라고 던진 말 한마디가 불씨가 되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수연이는 가출청소년이었다. 알코올중독 아버지의 가정폭력 때문에 엄마가 먼저 가출하셨고 그다음은 수연이의 차례였다. 처음에는 놀이터나 골목에서 돈을 뺏으며 생활하다가 핸드폰 같은 고가품을 뺏어서 내다 팔며 돈을 만졌다. 그러다가 언니오빠들과 함께 불미스러운 일에 엮이고 경찰서를 수 차례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청소년 센터로 가게 됐다는 것. 그때 마침 도망간 엄마와 연락이 닿았는데 엄마가 어떤 돈 많은 아저씨를 만나서 생활이 나아졌으니 검정고시 합격증을 가져오면 좋아하던 미용 쪽으로 대학도 보내주겠다고 해서 학원에 오게 됐다고 했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 삶이 최악으로 억울하고 불공평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적어도 나는 나를 길러주는 엄마와, 되돌아갈 집이 있었다.


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 어떤 의미에서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휘황찬란한 외모 속에 그들은 하나같이 상처를 감추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 또한 많은 문제적 청소년들 중에서는 운이 좋은 아이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검정고시를 볼 것이고
미래를 꿈꾸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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