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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록 May 09. 2023

42. 여자라서 겪는 일

물론 남자라서 겪는 일도 있겠지만.

내가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엄마는 나를 위해 주변에 대학을 다니고 있거나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20대의 언니나 오빠를 찾아주고 싶어 했다. 학교를 다니고 있지 않았기에 학업계획이나 장래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던 나를 위해 멘토 역할을 해줄 사람을 찾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건너 건너 소개를 받은 한 오빠가 있었다. 또래보다는 조금 늦은 나이에 군복무를 마치고 막학기 복학과 동시에 취직에 성공한 그는 적극적으로 우리 모녀를 도와주었다. 그 사람과 나는 주말마다 만났고 그는 내 과외선생님처럼 학원에서 준 기출문제나 예상 문제들 중 어려운 것이 있으면 설명을 해주고 대입 관련 수시 일정 등도 자세히 알아봐 주었다.


우리 모녀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웠고, 특히 나는 언젠가 내가 그 사람처럼 사회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면 나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학생들을 위해 멘토링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수업을 받은 지 한 달쯤 되었으려나, 그가 갑자기 불편한 대화를 시작했다.

“옛날에 사귀던 내 여자친구는 가슴이 좀 작았는데, 너는 한 B컵 정도 되나?”

 “네????”

“아니 뭐, 너도 이제 알 거 다 아는 나이잖아?”

“………”

“여자친구가 속옷 벗어놓은 거 보면 브라가…..”


그는 너무나 불편한 이야기들을 손짓과 시선을 곁들여 이야기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몰랐다. 단지 외국에 살다왔다는 이유로 다 아는 척, 다 괜찮은 척 쿨하게 굴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유교걸처럼 펄쩍 뛰며 얼굴을 붉혀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시작된 불편한 대화는 수업 때마다 이어졌는데, 엄마는 그 사람에 대해  “결혼할만한 남자"라며 칭찬일색이었던 상황이어서 이런 상황을 말씀드릴 수 없었다. 그냥 빨리 검정고시가 끝나고 그와의 만남도 끝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지막 수업날, 마지막 수업이니 맛있는 걸 사주겠다며 강남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내 앞으로 검은색 세단이 멈춰 서더니 창문이 내려가고 그가 보였다.


“새록아, 타!”

대로변에서 멀뚱멀뚱 서있다가 뒤에서 빵빵거리는 택시 때문에 엉겁결에 조수석에 탔다.  

“새록이 예쁘게 하고 나왔네? 데이트한다고 준비하고 나온 거야?” 그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그는 나를 역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다시 차에 타도록 했다. 내가 걸어가도 된다고 해도 굳이 친절하게 조수석 문까지 열어주었다.

“아, 내가 말 안 했었나? 도곡동에 부모님이 주신 집이 있는데, 보고 갈래?”

“아뇨 괜찮은데요. 그냥 아무 데서나 내려주셔도 돼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보고 가. 나 결혼할 준비 다 됐다니까?”

“네?????????”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 사이 차는 도곡동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어둑하고 조용한 지하주차장. 나는 차가 멈추면 예의고 뭐고 그냥 뛰쳐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 아니니까.

“새록아, 네가 어디 가서 나 같은 남자를 만나겠니? 집 있고 차 있고 돈 잘 벌고. 너 사정 어려운 거 다 아는데 그냥 오빠랑 결혼하자.”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가왔고 거칠거칠한 수염이 얼굴에 닿으며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그 소름 돋는 거칠함을 피하고 팔과 다리로 그의 몸을 밀어내도 완강한 힘은 어쩔 수 없었다.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어도 남자의 힘은 여자가 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겁이 났다.


그의 손이 내 블라우스 속으로 들어오려던 순간 밀고 들어온 그의 입술을 콱 깨물었다. 비릿한 맛과 함께 그의 욕설, 그리고 따귀가 이어졌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차문을 열어젖히고 주차장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는 냅다 뛰었다. 같이 굴러 떨어진 가방을 목숨줄인 양 움켜 안은채. 뒤에서 무언가 소리치는 목소리와 비웃는듯한 웃음소리를 들었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앞으로만 뛰었다. 다행히 그는 쫓아오지 않았다.

개미지옥같이 복잡했던 주차장을 돌고 돌다가 주차장램프를 거꾸로 뛰어 올라가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세상은 평온했다. 나만 숨이 턱끝까지 차고, 나만 눈물콧물 범벅이고, 나만 손발이 떨리고, 나만 얼굴이 욱신거리는, 나만 이상한 세상.

그전까지는 성추행, 성폭행 뉴스를 보면 왜 여자가 거절을 못했는지, 왜 당하고만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어쩌면 여자가 먼저 꼬리치진 않았을까? 어쩌면 여자도 돈이든 뭐든 원하는 게 있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내가 당해보니 애초에 저항이란 불가능했다. 난 고작 열여덟이었고, 어쩌면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일 수도 있겠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의 여자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남자와 여자는 태초부터 평등하지 않은 존재들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때만큼은 그랬다.


결혼은 개뿔.
너랑 결혼할 여자가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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