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리뷰_진짜 술 이야기 '바-레몬하트'
대학시절 자주 가던 음악바 '마리아'라는 곳이 있었다. '서른 즈음에', '더 바' 같은 곳들과 함께 내 대학시절을 채워준 3대 바(Bar)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른 즈음에나 더 바에서는 주로 맥주를 마셨다면 마리아에서는 대부분 칵테일을 마셨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면 항상 아찔할 정도의 향내음이 바 안에 가득했다. 한 켠에는 철 지난 잡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쩌다 혼자 마리아에 가게 되면 먼지를 털어내며 잡지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겼다. 왼손에는 칵테일 한잔이 있었는데 때로는 진토닉이었고, 때로는 블랙러시안이었다.
'블랙러시안(Black Russian)'
이름도 생소한 이 칵테일을 마시게 된 것은 순전히 여자에게 차였기 때문이다. 좋아하던 여자에게 보기 좋게 차인 어느 날 혼자 마리아를 찾았고, 취하기 좋은 술을 무작정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때 나온 술이 블랙러시안이었다. 보드카 베이스에 커피 리큐어를 넣은 블랙러시안은 30도가 넘는 무지막지한 칵테일이지만 맛있다. 그래, 정말 맛있었다. 여자에게 차인 그 날 나는 블랙러시안을 처음 마셨고, 생각지도 않게 맛있는 술을 만났다는 생각에 서너 잔을 연거푸 마셨다. 아무리 커피가 달아도 보드카를 서너 잔 마시면 속이 쓰리다. 아리다. 그렇게 블랙러시안은 사랑의 실패로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건 샴페인 거품 같군요
부인, 당신의 입술이
내 입술을 붉게 물들인
지금 이 순간만의 사랑
그건 샴페인의 거품 같군요
-호리구치 다이가쿠
나보다 먼저 살다 간 일본 시인 호리구치 다이가쿠도 사랑의 실패를 술에 비유해 노래했다. 이 양반, 뭔가 아는 양반이다. 사랑을 샴페인 거품에 비유하다니, 나보다 수준이 몇 단계는 높다. 찾아보니 제법 유명한 시인. 수긍이 간다.
술과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술이 있는 자리에 사랑이 생기고, 사랑이 떠난 자리에 술이 남는다. 아무 술이나 아무렇게나 들이키던 20대가 지났다. 30대에 접어들자 나는 '좋은 술을 제대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랑의 실패를 블랙러시안으로 달래 준 마리아의 사장님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맛있는 술을 추천할 수 있을까. 그런 내 눈에 띈 만화가 바로 후루야 미츠토시의 '바-레몬하트'다.
바(Bar) 버전의 심야식당이라고도 불린다. 읽어본 바 틀린 설명은 아니다. 마스터와 손님과의 대화,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그 이야기에 어울리는 술이 등장한다. 때로는 마스터가 때로는 손님이 술을 꺼낸다. 심야식당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구성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 심야식당의 이야기들을 아주 많이 좋아했지만, 한국인으로서 다소 공감하기 어려운 소재나 이야기 전개가 있었다. 바-레몬하트의 이야기는 거부감이 없다. 음식과 술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심야식당의 정서를 좋아하지만 나폴리탄이나 호박국수는 우리에게 생소한 음식이다. 일본인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던 정서가 움직이겠지만, 우리에게 나폴리탄은 네이버를 검색해봐야 하는 음식일 뿐이다.
술은 다르다. '칵테일은 마티니로 시작해서 마티니로 끝난다고 한다'는 말은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토를 달 수 없다. 사랑을 샴페인 거품에 비유한 호리구치 다이가쿠의 시를 우리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여성이 셰리를 마시고 싶다고 한다면 긴장해야 한다. 그건 '오늘 밤 같이 자고 싶어요'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술을 알고 마시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소통한다. 애주가, 혹은 술을 알고 마시는 사람들만의 언어다. 위스키와 칵테일, 맥주, 와인... 바-레몬하트를 장식하는 이 많은 종류의 술들은 홍대 어느 골목의 바에서도 만날 수 있다. 술은 만국 공통이다. 바-레몬하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술들
2권
실버라도
보드카는 12세기경 러시아에서 처음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실버라도는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보드카다. 보통 옥수수와 감자를 주원료로 보드카를 만드는데 실버라도는 유일하게 포도만을 사용해 만드는 보드카다. 굉장히 희소성이 있다. 정체가 베일에 싸인 바-레몬하트의 단골 안경씨는 어느 날 차갑지 않은 실버라도를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 위험한 임무를 맡는다.
9권
더 글렌리벳 21년
마스터와 안경씨가 '더 위스키'를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마스터의 퀴즈를 맞춘 안경씨에게 마스터는 비장의 술을 꺼낸다. 바로 더 글렌리벳 21년. 글렌리벳 증류소는 1824년에 등록된 스코틀랜드 정부 공인 1호 증류소다. 스카치의 아버지로 불리고 타사 제품의 몰트 원액으로 쓰인다. 특별히 엄선된 몰트는 블렌딩하지 않고 더 글렌리벳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21년은 그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맛. 마스터가 처음 견습 바텐더를 할 때 만들던 미즈와리가 더 글렌리벳이다.
13권
킨크레이스24 OLD
킨크레이스 증류소는 1975년 폐쇄됐다. 1982년에는 건물까지 완전히 헐렸다. 1975년 이후 한 번도 생산되지 않은 킨크레이스는 오피셜 싱글몰트로는 판매된 적 없는 수수께끼의 싱글몰트다. 원래는 블렌드 용이다. 현재의 재고품이 모두 소진되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운명의 술. 마스터는 고향이 댐 건설로 물에 잠겼다는 손님에게 킨크레이스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