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리뷰_한국영화 최고의 10경
'경'은 우리가 경치가 좋다, 경관이 좋다고 할 때 그 경(景)의 의미다. 또 거울, 안경, 렌즈 따위를 써서 물체를 볼 수 있게 한 광학기구를 의미하는 경(鏡)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을 트랜스, 즉 가로지르고 넘어가면서 새로운 경(經)전의 구성을 향해 가는 것이기도 하다.(6p)
영화평론가인 김소영 교수의 '한국영화 최고의 10경'은 한국영화를 어떻게 볼지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공한다. 장편영화인 '경'을 직접 연출하기도 한 김 교수는 한국영화 속 여성, 그리고 근대의 소외자들에 종종 초점을 맞춘다. 다소 어려운 구석이 있지만 한국영화사의 한줄기를 훑어보는 데 이만한 책도 없다 싶다. 김 교수의 말처럼, "영화여, 영원히!"
시작은 장률 감독의 '경계'와 '망종'이다. 재중 동포 감독인 장률은 탈북자, 재중동포의 이야기를 다룬다. 장률 스스로는 "국적은 정치가들이 주고받는 것이고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영화는 경계가 주는 공포와 횡포를 이야기한다.
동시에 장률의 영화는 내셔널 시네마의 경계에 대한 질문도 던진다. 재중 동포 감독과 한국인 제작자, 탈북자 역을 맡은 한국인 배우들, 장률의 영화는 곧 21세기 한국이다. 다문화사회에 진입한 한국의 상황과 그의 영화가 오버랩된다. 경계에서 반복되는 갈등과 불화를 어떻게 받아들이지에 대한 고민도 계속된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세계화 시대를 겪은 한 남자의 판타지로 해석된다. 오대수는 15년 동안 감금된 채 TV를 통해 정치적 격변과 사회의 변화를 접한다. 사회적 적응력은 당연히 없을 수밖에. 하지만 풀려난 오대수에게는 거액의 돈과 듀퐁 양복이 주어진다. 김소영은 이를 '가속화된 세계화, 그리고 강제화된 세계화인 IMF를 겪으면서 실업자 또는 홈리스가 된 한 남자의 판타지'로 읽는다.
올드보이의 근친상간은 오대수가 감금된 이유이자 복수의 방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를 세계화에 대한 반응으로 본다는 점이다.
"IMF와 세계은행 같은 추상적인 기구들이 일상을 지배하고 명령하는 것과 달리, 근친상간이 불러일으키는 죄의식과 쾌락을 동시에 포함하는 강렬한 정동의 역동성은 그러한 체제로부터의 탈출과 추방을 이중적으로 지시한다."(84p)
김태용의 만추 이전에 이만희 만추가 있었다.
한국 현대 영화의 주요한 감독 중 한 명인 이만희의 영화는 '무드'라는 한 글자로 요약된다. 이만희 감독은 1961년부터 14년간 50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주마등'부터 '삼포 가는 길'까지 그 필모그래피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고 한다.
김소영은 이만희 영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교란하며 '무드'라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를 통일한다. 그는 "멜랑콜리와 무기력이 있는가 하면, 시네필적 현현에 다름 아닌 흥분, 즉 신대륙 발견(장르)과 횡단의 활력도 있다. 심리적 도착성과 유토피아적 아나키즘이 공존하는 이만희의 50여 편의 영화는 그야말로 '무디(moody)'하다"고 말한다.
김태용 감독이 리메이크한 만추는 이만희 무드를 잘 보여주는 영화로 꼽힌다. 위폐범인 신성일을 묘사할 때 나타나는 생략의 연출법, 뛰어난 영상미는 당대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만희만의 무드였다.
66년도 수작 짜릿한 시정과 함께 가슴 메는 인간의 고독, 뛰어난 영상과 '무드'의 66년도 수작-조선일보, 1966년 12월 4일
김소영은 영화 '괴물'을 할리우드 영화 '킹콩', '우주전쟁'과 비교한다. 킹콩과 우주전쟁의 전선이 계속해서 확대되는 것에 비해 괴물의 전선은 한강을 벗어나지 않는다. 괴물과 괴물에게 잡힌 아이를 구하려는 가족은 한강 주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닐 뿐이다. 이런 한계공간은 포스트-냉전 시대에도 냉전을 종식하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과 겹쳐진다. 확장도 증식도 하지 않는 괴물 속 괴물은 "남한의 지정학적 상황처럼 한강 주변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소영은 영화 괴물에 어머니의 존재가 부재하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 부재가 은연 중에 문책당한다는 지적을 통해 젠더정치학의 관점에서 괴물의 한계를 언급하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의 다른 작품인 '살인의 추억'처럼 사라진 여성과 이를 구하지 못하는 공권력이라는 묘사가 반복되는 점도 언급된다.
'최후의 증인'과 '마더'에서는 좀 더 본격적으로 여성에 대한 담론이 나온다. 최후의 증인은 빨치산에 속했던 18세 여성 손지혜의 20여 년에 걸친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빨치산 안에서의 전시 강간, 집단살인,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마더에서는 '어머니가 생명을 주었으니 그 생명을 앗아갈 수 있으리라는 두려움, 남성적 불안'을 다룬다. 치료제와 독을 동시에 의미하는 파마콘의 이미지가 마더에서 나타난다. 동시에 마더는 국가의 무능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공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녀를 죽인 진범이 풀려나고 다운증후군을 앓는 듯한 친구가 감옥에 갇힌다. 김소영은 "이 많은 억울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묻는다.
김기덕 감독의 '빈집'과 '시간'에서 김소영은 고민을 발견했다. '나쁜남자'를 계기로 김기덕과 페미니즘 진영은 치열한 공방을 펼쳤고, 김소영도 나쁜남자에 대해서는 목불인견이라는 말로 일축한다. 하지만 사마리아 이후 김기덕은 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김소영은 김기덕을 '페미니즘의 비판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변화를 꾀한 동시대 감독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김기덕의 시간은 성형이라는 틀을 빌려와 생체 권력에 대한 사유를 한다. 시간에서의 절대권력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성형외과 의사다. 김소영은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시간의 적대는 오래된 연인의 그것을 넘어 생체 권력을 포함하는 사회적 측면으로 슬그머니 확장된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철학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우가 잠들고 새희는 말한다.
제가 원하는 대로 되었어요. 제가 행복해 보이나요?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네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요.
-다룬 영화들
<경계> 장률, 2006
<망종> 장률, 2005
<청춘의 십자로> 안종화, 1934
<반도의 봄> 이병일, 1941
<하녀> 김기영, 1960
<올드보이> 박찬욱, 2003
<검은 머리> 이만희, 1964
<귀로> 이만희, 1967
<쇠사슬을 끊어라> 이만희, 1971
<괴물> 봉준호, 2006
<최후의 증인> 이두용, 1980
<마더> 봉준호, 2009
<천년학> 임권택, 2006
<해변의 여인> 홍상수, 2006
<강원도의 힘> 홍상수, 1998
<빈집> 김기덕, 2004
<시간> 김기덕, 2006
<열녀문> 신상옥, 1962
<자유부인> 한형모,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