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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에서 화해와 소통을 굽다

일곱 번째 리뷰_김연수와 하루키, 레이먼드 카버를 중심으로

by 이기자

소설가 김연수는 어디에선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 '세상의 끝, 여자친구'에서 했던 말인가 싶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니 작가의 말에서 김연수는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모른다, 라고 해야 한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이 글은 빵과 빵집에 대한 이야기다. 빵에 대해서는 먹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먹는 것 만큼은 제법 '잘' 먹는다고 할 수 있다. 오월의 종, 이성당, 성심당... 맛있다는 빵집은 전국 어디에 있어도 찾아가서 먹어본다. 맛있는 빵은 몇 개를 먹어도 계속해서 먹게 된다. 금세 배가 다시 고파진다는 공통점도 있다. 이 글은 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공복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극심한 공복감을 빵으로 이겨냈을 때 찾아오는 어떤 거룩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공복감


"공복감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물론 먹을거리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 먹을거리는 왜 없는가? 같은 값어치를 지닌 교환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왜 같은 값어치를 지닌 교환물이 없는가? 아마도 우리에게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공복감은 그저 상상력의 부족에서 곧바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빵가게를 습격하다, 하루키, 11p)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단편인 빵가게 습격과 빵가게 재습격에서 공복감에 대해 말한다. 하루키가 뒤에 털어놓듯 빵가게 습격을 쓴 것은 존 레넌이 살해당한 직후의 일이다. 존 레넌이 1980년 12월에 살해당했으니 이 소설이 쓰인 것도 그 즈음이다. 하루키는 "그렇다, 사회 분위기가 나름 삭막하고 절실했던 것이다. (어쩌면) 빵가게를 습격하고 싶어 질 정도로"라고 말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빵가게를 습격하러 간다. 한 손에는 부엌칼을 손에 쥔 채로 말이다.


하루키의 공복감이 당대의 큰 사건,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비롯됐다면, 레이먼드 카버의 공복감은 좀 더 개인화돼 있다.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 중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아이를 잃는 엄마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는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다. 아이의 엄마 앤은 아이의 상태를 지켜보며 갈수록 초조해진다. 앤은 처음에는 입맛이 없다. 아이의 회복을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에서 음식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그녀는 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어떤 곳을 방문한 뒤에야 허기를 느낀다. 앤에게 공복감은 현실이고, 인생 그 자체이자, 위로의 의미다.


그렇다, 사회 분위기가 나름 삭막하고 절실했던 것이다. (어쩌면) 빵가게를 습격하고 싶어 질 정도로


김연수에게 공복감은 좀 더 복합적인 의미다. 김연수의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는 '뉴욕제과점'이 등장한다. 경상북도 김천역전 앞에 있었던 뉴욕제과점은 김연수가 태어난 곳이다. 뉴욕제과점은 '우리(김연수의) 삼남매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필요한 돈과 어머니 수술비와 병원비와 약값만을 만들어낸' 곳이다.


하루키가 빵가게 습격을 결심할 무렵 뉴욕제과점도 변화의 기회를 맞이한다. 김연수는 뉴욕제과점에 세 차례 변화의 기회가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이 때가 첫 번째 기회였다. 김연수는 "처음 기회는 박정희가 죽고 난 뒤에 찾아왔다. 빵이라면 고급 생과자만을 생각하던 사람들도 그즈음부터 일상적으로 빵을 사 먹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뉴욕제과점은 첫 번째 변화의 기회를 제법 잘 살렸다.


김연수는 빵집 아들이었지만 빵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다. 빵은 김연수 삼남매가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 필요한 돈이었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연수에게는 적정가치를 지닌 교환물이 없었다. 빵은 김연수에게 먹을거리가 아니었다. 그와 그의 가족의 생계를 위한 교환물이었다. 그래서 김연수에게 돌아온 몫은 기레빠시였다. 카스텔라의 기레빠시를 먹으며 김연수는 자랐다. 김연수는 계란과 박력분이 범벅이 된 기레빠시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김연수는 먹고 싶은 빵을 훔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뉴욕제과점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변화의 기회는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김연수의 어머니가 자궁암 판단을 받고 입원하면서 두 번째 기회가 지나갔고,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주창할 때 찾아온 세 번째 기회를 살리기에는 뉴욕제과점에 남은 생명력이 없었다. 기레빠시도 버리지 않던 뉴욕제과점은 며칠에 한 번씩 팔지 못해 상한 빵을 버리는 처지가 됐다.

"뉴욕제과점은 1995년 8월 결국 문을 닫았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것이니까 이걸 비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나보다 먼저 세상에 온 것들은 대개 나보다 먼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정상적인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니까 뉴욕제과점이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일도 그와 마찬가지다."(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 73p)


빵집 아들이 먹고 싶은 빵을 훔쳐야 할 때, 어느 순간 기레빠시가 질려버렸을 때, 김연수의 공복감은 그런 순간에 찾아온 것이 아닐까. 또는 박정희가 죽고, 5공화국이 끝나고, 김영삼이 세계화를 주창할 때도 김연수는 공복감을 느낀 듯하다. 그에게 뉴욕제과점의 일생과 한국 현대사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빵을 먹는다는 것


"바그너의 음악을 귀담아 잘 들어주면, 빵을 마음껏 먹도록 해주지."

빵가게를 습격하다의 주인공인 '나'는 빵가게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귀담아 듣는 것'과 '가게 안의 빵을 마음껏 먹는 것'을 교환한다. 주인공은 공복감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하루키의 빵가게를 습격하다는 애초에 따로 나온 단편 2개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첫 단편인 '빵가게 습격'은 1981년 와세다 문학 10월호에 실렸고, 두 번째 단편인 '빵가게 재습격'은 1985년 '마리끌레르' 8월호에 실렸다. 빵가게 재습격에서 주인공은 번듯한 직장을 갖고 있고 돈(교환물)도 있으며 갖 결혼한 신혼부부다. 하지만 불현듯 주인공과 그의 아내는 공복감을 느낀다. 새벽 두시를 앞두고 찾아온 '불합리할 정도로 압도적인 공복감'을 그들은 저주라고 규정한다.


주인공이 말한다.

"정상적인 사고의 관점에서 보면 선택은 옳았어.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았고, 각자가 일단은 만족했으니까. 빵가게 주인은 바그너를 홍보할 수 있었고, 우리는 배불리 빵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거기에 뭔가 중대한 오류가 있다고 느꼈어. 그리고 그 원리를 알 수 없는 오류가 우리 생활을 따라다니게 되었지. 아까 내가 저주라는 말을 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야."

아내가 말한다.

"당신이 자기 손으로 그 저주를 풀지 않는 한, 그것은 고약한 충치처럼 죽을 때까지 당신을 괴롭힐 거야."

(빵가게를 습격하다, 하루키, 47~49p)


주인공과 아내는 레밍턴 사의 자동식 산탄총을 들고 맥도널드를 습격한다. 서른 개의 빅맥 햄버거와 라지 사이즈의 콜라 두 잔(돈을 주고 산)을 먹으며 그들은 기아감이 소멸해감을 느낀다. 공복감에 잠을 깼던 아내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저주란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지. 전철시간표와는 달리


빵을 먹는다는 것은 저주를 푸는 과정이다. 존 레넌이 죽고 한 세대에 쌓인 저주의 주문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빵가게를 습격하고(습격에 성공한 곳은 맥도널드이지만), 그 빵들을 먹어치우는 과정이 필요했다. 동시에 빵집은 갈등과 분노가 해결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비록 엄밀한 의미에서 습격에 실패했지만, 주인공과 파트너는 첫 번째 빵가게 습격에서 허기를 채우고 감동을 느낀다. 빵가게는 대러미에 쉰 살이 넘은 공산당원이 카세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바그너에 심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루키에게 빵집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상반된 사상이 공존 가능한 화해의 공간이다.

카버는 좀 더 직접적으로 화해를 도모한다. 아이가 혼수상태일 동안 앤의 집에는 계속해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기분 나쁜 전화가 걸려온다. 앤은 아이가 죽고 나서야 그 전화의 발신지를 알아차린다. 아이의 생일을 앞두고 케이크를 주문했던 빵집이었다. 앤이 케이크를 찾으러 오지 않자 빵집 주인은 계속해서 전화를 했고, 앤은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정체불명의 전화에 히스테릭해진다. 마침내 앤이 빵집을 찾아갔을 때, 앤과 빵집 주인 사이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앤은 "그 애는 죽었다구, 이 나쁜 놈아!"라고 외치고 흐느낀다.


화해는 그 순간 찾아온다. 빵집 주인은 갓 구운 계피롤빵을 가져온다. 앤과 그의 남편이 롤빵을 하나씩 집어먹을 때까지 빵집 주인은 기다린다. 그는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라고 말한다. 앤은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허기를 느낀다. 앤은 지치고 화가 나있었지만 빵집 주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빵집 주인은 외로움과 회한, 무력감에 대해 말했다. 동시에 빵집 주인으로서 일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는 자신이 꽃장수가 아니라 좋았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만드는 게 더 좋았다. 언제라도 빵 냄새는 꽃향기보다 더 좋았다."(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142p)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이자 리얼리즘의 대부라고도 불리는 카버는 위태로운 현실의 풍경들을 묘사한다. 때로는 카버의 손 끝에서 많은 풍경들이 조각나고 깨져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만큼은 카버도 희망 섞인 변화를 이야기한다. 매일 전화를 주고받으면서도 한 순간도 소통하지 못했던 앤과 빵집 주인은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화해하고 진심 어린 소통에 성공하는 듯하다. 카버의 말처럼 이 마지막 순간은 영성체 의식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빵집은 인류 역사 이래 언제나 화해와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 잡아온 것이다.


"그 부부는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죠. 그게 긍정적이라는 겁니다. 일종의 영성체 의식인 셈입니다. 두 이야기는 긍정적으로 끝나기 때문에 제가 정말 좋아합니다. 이 두 단편이 살아남는다면 제가 정말 행복할 겁니다." - 레이먼드 카버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그건 형광등 불빛 아래로 들어오는 햇살 같았다.


김연수가 인간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김연수는 "십 년 전과 달리 인간과 인간은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인식의 변화가 예정돼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뉴욕제과점에서 태어난 김연수는 단팥빵과 크림빵, 곰보빵, 찹쌀떡, 도넛, 우유식빵, 그리고 기레빠시를 먹으며 매 순간 화해와 소통, 인생에 대해 고민했으리라.


김연수는 말한다.

"서른이 넘어가면 누구나 그때까지도 자기 안에 남은 불빛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게 마련이고 어디서 그런 불빛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한때나마 자신을 밝혀줬던 그 불빛이 과연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한때나마. 한때 반짝였다가 기레빠시마냥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게 된 불빛이나마.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불빛이나마."(79p)

"추억 속에서 조금씩 밝혀지는 그 불빛들의 중심에는 뉴욕제과점이 늘 존재한다. 그리고 이제는 뉴욕제과점이 내게 만들어준 추억으로 나는 살아가는 셈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 다음에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위안이 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91p)


뉴욕제과점이 있던 자리에는 24시간 국밥집이 생겼다. 고향 친구들과 술을 많이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김연수는 뉴욕제과점이 없어지고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그 국밥집으로 향한다. 가족의 추억이 남아 있는 그 국밥집에서 김연수는 국밥을 먹었다. 국밥은 따뜻했고 역전 거리의 불빛들은 둥글게 아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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