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리뷰_도스토예프스키 '대심문관'
움베르토 에코가 파리리뷰 인터뷰에서 지식인의 정치적 책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에코는 이렇게 답했다.
"지식인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관해서만 진실로 유용하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당신이 극장에 있는데 불이 났다면 시인은 의자 위로 올라가서 시를 암송하면 안 됩니다. 지식인의 기능은 미리 어떤 일을 얘기해주는 겁니다. 시인의 말은 예언적인 호소문의 기능을 갖습니다. 지식인의 기능은 '우리가 이 일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가 아니라 "우리는 이 일을 당연히 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코의 관점에서 본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은 다시없을 호소문이다. 대심문관은 1700쪽에 달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관통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심문관의 문제제기와 그 해답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대심문관을 세계 문학의 걸작이라고 평가했는데, 이 짧은 작품이 제기하는 문제의 깊이와 인류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위대한 작품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나머지 부분이 대심문관과 그 앞 장 반역에 나타난 이반에 의한 '신의 강력한 부정'에 대한 '회답'이라고 수첩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대심문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장편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실린 단편, 혹은 산문시다. 대심문관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진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와 관련한 새로운 소설을 쓸 만큼 오래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삽입했다고 한다. 대심문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다. 동시에 이 독립된 작품은 나머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대심문관이 이 불공정한 신에 모반을 일으키는 인간을 묘사한다면, 작품 전체는 부당한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키는 자식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대심문관이 이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실효성을 문제로 삼고 있다면, 작품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운명을 상술하고 있다."(대심문관, 이종진, 9p)
도스토예프스키는 두 가지 대립하는 존재, 혹은 가치를 놓고 평생 고민하고 갈등했다. 편역자인 이종진에 따르면 이 갈등은 '절대적 선과 절대적 악의 원리', '예수 그리스도와 로마 가톨리시즘 및 무신론적 사회주의' 사이에서 벌어진다. 젊었을 때 사회주의에 경도된 적이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체포된 이후 시베리아에서 10년을 보낸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이 그가 찾은 해답이자 그의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도스토예프스키 기념 강연으로 유명한 솔로비요프에 따르면 이 주제의식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유로운 전 세계적 단합, 전 세계적 형제애를 구현하려는 그리스도의 사상이다. 그러나 세계는 강제로 구원돼서는 안 된다. 그의 이상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결합뿐만 아니라, 요컨대 인간적 결합이다. 문제는 결합에 있지 않고 결합에 대한 자유로운 동의에 있다."(대심문관, 이종진, 14p)
카라마조프의 아들인 드미트리는 "거기서는 악마와 신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싸움터가 인간의 마음이다"라고 말한다. 대심문관이 위대한 걸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도스토예프스키 스스로 찾아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말을 빌리자면 "놀라운 것은 작품이 아니라 관점이다. 성실하고 자연스럽고 그리스도교적인 관점 말이다. 어제는 오랫동안 즐기지 못했던 독서를 하루 종일 즐길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보게 되면 내가 좋아한다고 전해 달라."
탈리타 쿠미
이야기의 무대는 15세기 스페인의 세빌리아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날마다 나라 안 여기저기서 장작더미가 타오르는 종교재판의 시대였다. 거의 백명에 가까운 이교도가 화형에 처해진 이튿날, 그리스도가 그 뜨거운 광장에 강림했다. 이반은 "그리스도는 그저 잠깐 동안 자기 자식들을 찾아보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를 따른다. 그리스도가 세빌리아에 머문 한나절의 시간 동안 그는 "탈리타 쿠미(소녀여, 일어나라)"라고 다시 한 번 외쳤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말에 죽은 아이가 관 속에 있던 흰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일어났다.
그리스도를 제지한 것은 나이가 거의 구십에 가까운 대심문관(추기경)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체포하라고 명령하고 그날 밤 신성 재판소의 감방으로 그리스도를 찾아간다. 이야기는 그날 밤 대심문관과 그리스도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대심문관의 힐책과 분노, 멸시와 그리스도의 키스에 대한 이야기다.
대심문관은 기적과 신비, 권위라는 합리적인 질서 체계를 내세운다. 대심문관은 그 자체로 악이지만 그는 평범한 인간에 대한 동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정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길을 택한다.
"인간이나 인간 사회에서 자유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 작열하는 불모의 광야에 뒹구는 돌들이 보이는가? 만일 그대가 이 돌들을 빵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인간은 은혜를 아는 순한 양떼처럼 그대의 뒤를 따르리라."
"인간이라는 이 불행한 존재에겐 타고난 자유라는 선물을 한시바삐 넘겨 줄 사람을 찾아내야 하는 것만큼 괴로운 고민거리는 없소."
"당신이 갈망한 것은 무서운 위력에 의한 인간의 노예적인 환희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이었던 거요. 그러나 이 점에서도 당신은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했었소. 그들은 원래가 반역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노예이기 때문이오."
"양떼를 흩어지게 하여 이리저리 낯선 길로 쫓아 버린 것은 대체 누구였소? 그러나 그 양떼는 다시 한데 모여 이번에는 영원히 복종하게 될 것인데, 그때 우리는 그들에게 대단치는 않지만 그래도 조용한 행복을, 천성이 연약한 동물에게 알맞은 행복을 줄 것이란 말이오."
그리스도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를 듣기만 한다. 대심문관은 자신의 말을 마치고 '죄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스도는 아무 말없이 다가와 노인의 핏기 잃은 입술에 조용히 키스했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자유로운 사랑, 차출되지 않는 사랑이다. 다시 솔로비요프를 인용하면 "세계는 강제로 구원돼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일이 아무리 위대해도 그 일이 인간에게 강요된다면, 그것이 전 인류에까지 확산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전 인류적인 것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대심문관에서 선언한 것은 전 인류적인 그리스도교의 완성이다. 교회적, 가정적인 그리스도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주변에 있지만, 전 인류적인 그리스도교는 여지껏 존재한 적이 없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 이후 이러한 완전한 그리스도교를 완성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멸종했을 수도 있다. 악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고 이 같은 믿음을 유지하는 일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위대한 출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