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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

아홉 번째 리뷰_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

by 이기자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은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마무리된다. 이 책은 2008년 7월 14일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이뤄진 바디우와 니콜라 트뤼옹의 대담을 엮은 것이다. 질의를 맡은 니콜라의 첫 질문은 사르코지에 대한 것이다.

"항간에 화제가 된 바 있는 저서 '사르코지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에서 선생님께서는 사랑이 늘 다시 발명되어야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방에서 위협받고 있기에 보호되기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것입니까?"


기나긴 대담은 어느새 결론에 이른다. 바디우는 다시 사르코지에 대한 대답으로 돌아가 답한다.

"카를라가 세실리아를 이어받았다는 게 정치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사르코지 대통령은 취임 6개월 만에 두 번째 부인인 이탈리아 모델 출신 세실리아와 이혼한 뒤, 카를라 부르니와 연인 관계가 된다.)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흥행하는 거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사랑 이야기 속에 우리의 관심사를 끄는 특유의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이 낮은 곳의 사람들로 향하도록 연출되어온 것을 늘 보아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두 가지입니다."


바디우는 대통령의 사랑이 가져다주는 두 가지 함의를 설명한다.

첫 번째는 사랑의 보편성이다. '심지어 사르코지도 고통스러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바디우는 "어떤 왕이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시골 농부와 왕을 서로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두 번째는 정치적 사유의 가능성이다. 바디우는 "열렬한 정념을 지닌 이 공동체는 왕이나 대통령, 독재자나 민중의 지도자들이 이 열렬한 정념 말고는 그 어떤 뛰어난 면모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폭로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또한 오쟁이진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그들을 존경할 아무런 이유도, 심지어 그들을 겁낼 그 어떤 이유도 없어져버리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왕관 혹은 다수결의 투표함 뒤에 숨어 있던 지배자를 사람들 앞으로 끌어내는 존재가 바로 사랑이다.


바디우는 젊은 시절 사르트르주의자였고 이후에는 확고한 마오주의자로 활동했다. 마오주의 운동이 쇠락한 이후에도 그는 정열적으로 새로운 대안을 찾아다녔다. 간단히 말하면 바디우는 공산주의자다. 그는 철학을 통해 사회의 변화와 혁명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고발한다. 그에게 철학이란 젊은이들을 '타락'시켜 지배질서에 맞서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의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을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철학의 역할이다.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을 위해서는 일종의 '사건'이 필요한데, 바디우는 사랑 예찬을 통해 사랑이 이런 변화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디우의 철학이나 사상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사랑 예찬은 현대 사회 사랑의 다양한 모습과 그 정치적 의미를 보여주는 탁월한 저서다. 바디우는 현대 사회 사랑의 몇 가지 단면들을 제시하며 사랑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한다.


위험 없는 사랑


'위험 없는 사랑'은 만남 주선 사이트가 내세우는 최고의 선전이다. 프랑스의 '미틱'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한국에만 해도 수많은 결혼중개업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성혼회원수를 내세우며 자신들에게 오면 고통받지 않고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선전한다. 바디우는 이 프로파간다를 '사랑=안전한 개념=보험'의 도식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판타지에 불과하다. 바디우는 "위험이 부재하는 체제에서 존재에 부여하는 이런 증여는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ebdh.JPG 한 결혼중개업체의 회원 분석 리포트. 회원들의 모든 정보는 수치화되고 평가된다.

'전사자 제로의 전쟁'

바디우는 위험 없는 사랑이라는 프로파간다가 전사자 제로의 전쟁이라는 미국의 프로파간다와 동일하다고 분석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할 때 생길 수밖에 없는 수많은 위험들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실 위험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들이 위험 없는 사랑이 가능하다고 오해하는 이유는 타인의 고통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전사자 제로의 전쟁에서 서구의 군인들은 안전할 수 있지만 공격 대상이 되는 아프가니스탄과 팔레스타인의 사람들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 바디우는 "안전한 사랑이란 훌륭한 보험 맞은편에는 온갖 위험에 노출된 사람이 버젓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디우는 사랑의 재발명이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그는 "세계는 사실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랑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혁신 속에서 취해져야만 할 것입니다.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창안해야만 합니다"라고 선언한다.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창안해야만 합니다


바디우는 사랑의 재발명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과 노력들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험적인 측면은 사랑에 필요한 것이겠지만, 한편,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끈덕짐을 덜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43p)


육체적 관계의 필요성 또한 언급한다.

"타인에게 제 몸을 맡기는 행위, 타인을 위해 옷을 벗는 행위, 알몸이 되는 행위, 태고의 몸짓을 완수하는 행위, 부끄러움을 모두 던져버리는 행위, 소리 지르는 행위처럼 몸과 결부된 행위로의 진입 따위는 사랑에 대한 위임의 증거로서 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 우정과 비교할 때 드러나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사랑은 특히 지속성 안에서 우정의 모든 긍정적 특징들을 취합니다. 그러나 또한 사랑은 타인이라는 존재의 총체성에 관련되며, 육체의 위임은 이 총체성의 물질적 상징이기도 합니다. 연인들은 심지어 가장 격렬한 섹스에서조차도, 몸이 사랑의 선언을 받아들였다는 그 증거 위로 평화가 내려앉을 때, 잠에서 깨어난 아침에, 마치 두 육신의 수호천사처럼 사랑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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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적은 명확하다. 그것은 경쟁자가 아닌 이기주의다.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내 사랑의 주된 적, 내가 쓰러뜨려야만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조하려 하는 '자아'입니다."(71p)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사랑은 어렵다. 굳이 세계적 철학자인 바디우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사랑은 어렵다. 사랑은 그리스 신화 속 미로와 같아서 한 번 발을 디디면 빠져나올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심지어 그 안에 살고 있는 괴물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 '남성의 사랑은 벙어리이고 여성의 사랑은 이야기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어려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런 불협화음은 그 자체로 사랑의 본질이기도 하다. 바디우는 사랑을 '다리 절기(boiterie)'라고 표현한다. 이 불가능한 걷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이자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바디우의 지적대로 사랑의 절차는 난폭한 물음, 견디기 힘든 고통, 우리가 극복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이별 따위를 동반한다. 이는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심지어 죽음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두려워서 달아나서는 안 된다. 둘의 모험을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바디우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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