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퓰리처상 속보사진 수상작을 보고
사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진에 관해서는 무지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럼에도 사진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사진가들에게 경탄하게 되는 그 순간이 좋다. 빛, 물결, 땀, 눈물, 아빠의 품에 안긴 아기의 작은 콧구멍 같은 것들은 나였으면 제대로 찍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제대로 포착한 사진들이 좋다. 사진에는 그림에는 없는 동시대성이 있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포착한 사진들을 보면 연대감 또는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사진을 제대로 찍는 사람들은 사진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낼 줄 안다. 베를린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안다. 대부분의 사진들이 슈프레강의 아름다운 노을이나 브란덴부르크문의 위용을 사진에 담지만, 어떤 사진들에서는 보이지 않는 선이 느껴진다. 베를린을 가로질렀던 선 말이다. 이런 일을 해내는 사진가들의 사진을 보는 일은 언제나 감격스럽고 좋다.
정신없는 4월을 보내고 맞이한 5월의 첫날. 지난달 발표된 2016 퓰리처상 수상작들을 찾아봤다. 올해 퓰리처상이 선택한 속보사진 부문 수상작은 유럽 난민들을 취재한 뉴욕타임스와 로이터였다. 그리스 레스보스 섬과 독일, 마케도니아, 헝가리로 몰려오는 난민들이 이들의 카메라에 잡혔다. 처절한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문득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는 난민들, 아이를 품에 안고 바다를 건너는 어느 난민 가장보다 내가 나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내가 저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살아 있는 것은 다만 우연일 뿐이다.
바를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를 읽고 있다. 이 책에는 "우리는 모두 다만 우연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극북의 수용소 생활을 다룬 책이다. 난민들에게는 그들이 걸어가는 모든 길이 극북의 수용소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난민들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고 있다는 뉴스를 들을 때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난민들, 특히나 아이들을 지키는 것은 모든 인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백인들에게 사지가 잘린 채 죽은 흑인 소년 에멧 틸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슬프고 비극적인 오류의 목적은 아마도 우리가 살아남을 만한 존재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만일 미국이라는 나라가 절망적인 문화에서 아이들을 살해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도달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또는 어떤 인종이든지 간에 우리는 살아남을 가치가 없습니다. 아니면, 아마 살아남지도 못할 것입니다."
나는 윌리엄 포크너의 이 말이 유럽의 난민 사태에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전 세계'로 바꾸기만 해도 어색하지 않다. 우리는 쿠르디를 기억한다. 무관심 때문에 바다에서 죽었던 아이. 세월호도 기억한다. 무관심 때문에 바다에서 죽었던 아이들. 아이들은 계속 죽어간다. 아이를 안은 채 필사적으로 바다를 건너는 난민 아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죽어간다. 우리는 모두 다만 우연히 살아남아 있는 것 뿐이다.
이번 퓰리처상 속보사진 부문 수상작들은 이 사실을 새삼 다시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만 우연히 살아남아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가 바다를 건너는 저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들을 우리가 살해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고, 그것은 우리 문명이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뉴욕타임스
로이터
* 사진들은 퓰리처상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www.pulitzer.org/prize-winners-by-year/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