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후기
# 스포일러는 없지만 두 영화 다 별로라는 후기이니 재미있게 보신 분들은 스킵하시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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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과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정말 다른 영화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감독의 이름을 보고 영화관을 찾은 사람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부산행>은 꽤 괜찮게 만든 한국식 여름 블록버스터였다. 좀비의 디테일은 예상외로 훌륭했고 달리는 기차에서 펼쳐지는 액션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아쉬운 부분들이 굉장히 많았지만 그래도 이 더운 여름에 시원한 영화관에서 두 시간을 보내기에 나쁠 건 없는 영화였다. 캡틴 마동석의 존재감만으로도 남는 것이 있었고 나의 최애 배우 중 한 명인 정유미를 스크린에서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
그런가 하면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단연코 내가 올해 본 영화 중에 최악이었다. 찾아보니 올해 본 영화가 스물여섯 편이었는데 정말로 최악이었다. 차라리 OCN이 만든 <나쁜 녀석들>이 나았다. 정말로 그렇다. <나쁜 녀석들>에 나온 강예원이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여러 안티 히어로들보다 낫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두 가지는 분명해졌다. DC와 워너에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여성 히어로 캐릭터만큼은 마블보다 앞서 있다는 것.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것 말고 <부산행>과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건 감독의 이름값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부산행>을 충무로의 여느 감독이 만들었다면 '시원하게 잘 뽑았네' 한 마디 하고 말았을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연출한 이가 연상호 감독이라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연상호 감독이 누구인가. 연상호 감독이 만든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과 <사이비>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연상호 감독은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지옥에 대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돼지의 왕>이 나왔을 때 연상호 감독이 씨네21과 한 인터뷰를 기억한다. 그는 "인간들이 형벌처럼 안고 사는 절망감을 그린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들은 끔찍했다. 그는 우리의 이야기, 모두의 이야기를 그렸다. 애니메이션이었지만 극장에 앉아 있는 동안 숨이 막힐 것처럼 끔찍하고 슬프고 괴로웠다.
<부산행>에서 연상호 감독은 자신의 모든 재능을 포기한 모습이다. 흥행을 위해 적당한 타협, 적당한 타협, 적당한 타협이 계속된다. 주인공 일행이 13호차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하는 다른 승객들의 모습 등 몇 군데에서 연상호 감독의 그림자가 번뜩이지만, 대체로 이 영화는 연상호 감독이 아니었어도 상관없었을 영화다. 앞으로도 연상호 감독이 실사영화에서 이런 수준의 영화를 만들어낸다면 그의 영화를 굳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가보다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이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줄 테니 그의 선택에 내가 뭐라고 할 권리야 없겠지만, 정말이지 아쉽다.
좀비 영화는 그 자체로 거대한 은유다. 조지 로메로 감독이 "지옥이 가득 차는 날, 죽은 자들이 땅 위를 걸을 것이다"라는 대사를 <살아있는 시체들의 새벽>에 넣은 이후로 좀비 영화는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지옥의 은유가 되었고, 그건 곧 우리 사회의 추악한 면들,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는 현실에 대한 은유다. <웜 바디스>나 <리빙데드3>가 좀비 영화에 로맨스를 가미했다고 해서 그런 은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좀비 영화가 가진 거대한 은유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런데 <부산행>은 그 자체가 은유인 좀비 영화에서 한국 사회는 '헬조선'이라는 비유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솔직히 우스웠다. 좀비 떼가 대도시를 습격하고 있는데 공무원이 한가하게 시위를 진압하고 있다고 말하는 뉴스 장면은 눈을 의심하게 했다. 관객으로 하여금 '이 망할 놈의 정부'라는 욕지거리를 내뱉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겠지만, 솔직히 현실성이 전혀 없으니 헛웃음만 나왔다. 연상호 감독이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줬던 그 날카로운 칼날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어설픈 현실 풍자는 좀비 영화라는 장르 자체와 끊임없이 부딪히며 공존하지를 못한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마찬가지다. 2014년에 개봉한 <퓨리>를 보고 거의 감동받기 직전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브래드 피트의 연기야 두말하면 입 아프고, 실감 나는 탱크전을 연출한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의 역량에 감탄했다. 미군의 셔먼탱크와 독일군의 티거탱크가 맞붙는 장면은 영화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멋있는 탱크전일 것이다. 마지막에 외따로 남은 탱크 퓨리가 독일군과 맞서는 장면에서는 정말이지 거의 감동받기 직전까지 갔다. 이 감독이 뭔가 아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래서, 정말 참담한 심정이다. 데이비드 에이어라는 동명이인 감독이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각본, 연출, 연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퓨리>에서 탱크 하나로 두 시간 넘게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6주라는 기념비적인 기간 안에 완성했다는 각본은 예상대로 엉망진창이어서 스토리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고, DC 코믹스에서 날고 긴다는 안티 히어로들이 존재감도 없이 쓰러져 가는 모습은 경악스러웠다. 슬립낫!!! 그나마 마고 로비의 할리 퀸이 영화를 살리는가 싶었지만 그마저도 중반부 이후부터는 뭘 하는지 모르겠다. 나쁜 놈들이 세상을 구한다더니 이 영화에서 나쁜 놈은 국장뿐이다. 나머지 안티 히어로들은 하나 같이 착하고 인류애가 깊은데다 의리로 똘똘 뭉쳐서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다른 악당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나쁜 걸로 치면 이 영화 속 악당들보다 우리 동네 슈퍼의 주인 할아버지가 한 수 위로 보인다. 이 부분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악당은 DC 세계관에서 핵심이다. DC가 마블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악당만큼은 제대로였다는 점이다. 히스 레저의 조커나 톰 하디의 베인 같은 캐릭터만 떠올려봐도 된다.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이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면 최소한 악당이라도 악당답게 그렸어야 했다. 그마저도 실패했다.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의 <퓨리>는 명작까지는 아니어도 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었다. 연상호 감독은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하는 자신만의 목소리가 있었고, 데이비드 에이어 감독은 <퓨리>에서만큼은 자신의 역량을 백분 발휘했다. 그렇지만 <부산행>과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는 두 감독의 색깔이 모두 사라졌다. 안타깝고 아쉽고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