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과 죽음 : <청춘시대>에 대한 메모

by 이기자

죽음이란 그림자는 언제부터 청춘의 뒤편에 드리워진 것일까.


얼마 전 민음사에서 나온 문학잡지 <릿터>를 읽던 중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다. 소설가 이영훈이 쓴 <청춘과 죽음 : 응답하라 시리즈와 터치>였다. 이 글에서 이영훈은 청춘과 죽음의 역학관계를 조명한다. 2010년대 최고의 청춘물로 자리잡은 '응답하라' 시리즈와 일본 최고의 청춘만화라고 할 수 있는 '터치'를 통해 죽음이 청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죽음을 통해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설정한다. 태웅의 연인이었던 송주가 죽었고, 나정의 오빠였던 훈도 죽었다. 죽음은 언제나 그들의 뒤편에 서 있었다. '터치'도 마찬가지다. 형제인 타츠야와 카즈야는 한 여자인 미나미를 놓고 경쟁하지만 어느 날 타츠야가 죽어버린다. 터치가 평범한 청춘만화, 야구만화에서 그치지 않은 이유는 타츠야의 죽음 덕분이다. 죽음이 끼어들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 치열하고 격렬해진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죽음 너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청춘은 모든 가능성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시기다.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에서 갑자기 마주친 세상의 끝. 죽음을 마주한 청춘은 모든 에너지를 쏟아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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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있는 이야기꾼은 언제나 죽음과 청춘의 역학관계에 주목했다. 나 스스로 청춘물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생각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그렇다. 베르테르는 젊고 슬프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젊음과 슬픔이라는 두 상태가 하나로 모이며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주지하듯이 베르테르는 방 안에서 자살한다. 베르테르가 죽은 것은 단순히 실연했기 때문이 아니다. 베르테르는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좌절감과 그로 인한 불화가 계속될 테니까" 자살한 것이다. 사랑의 가능성으로 충만했던 베르테르가 죽음을 택하는 순간 이야기는 불멸의 길을 걷게 됐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떤가. 그의 대표작인 <노르웨이의 숲>은 기즈키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와타나베와 기즈키, 그리고 나오코의 삼각관계는 기즈키의 죽음 때문에 한 축이 무너진다. 청춘이 삐걱거리는 이유는 죽음 때문이다.


서론이 길었다. 추석 연휴에 박연선 작가의 드라마 <청춘시대>를 정주행했다. <연애시대>를 인상적으로 보고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다. 10년 만이다. 그러고 보면 <연애시대>도 죽음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박연선 작가가 죽음을 활용하는 방식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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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시대>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죽음을 안고 산다. 귀신을 본다는 송지원의 말에 모두 각자의 귀신을 떠올린다. 유람선 화재로 죽을 뻔했던 강이나는 자신이 살기 위해 떠밀었던 어린아이를 떠올리고, 윤진명은 6년째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생을 생각한다. 유은재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아버지를 떠올린다. 정예은과 송지원은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죽음을 마주한다. 그래서 진명 동생의 장례식장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아버지가 죽었던 은재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장례식장이 처음이라며 낯설어한다. 절을 해야 할지 목례만 해야 할지 모른다. 초여름에 두꺼운 옷을 입은 정예은이나 속이 비치는 시스루를 입은 강이나의 모습은 어색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죽음은 낯설 뿐이지 멀리 있던 것이 아니다. 진명과 알고 지낸 지 2년이나 됐는데도 혼수상태에 빠진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혼자 투덜대는 예은의 말에서, 죽음은 알지 못하지만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다.


죽음은 청춘의 지근거리에 있다. 다만 볼 수 없을 뿐이다. 그렇지만 죽음은 이따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한다. 늦은 밤 골목길을 걷다 보면 나의 그림자를 갑자기 마주하고 주춤하는 것처럼. 죽음은 청춘의 그림자 같은 존재다.


<청춘시대> 주인공들이 사는 집은 밝고 깔끔하고 사랑스럽다. 다시 오지 않을 좋은 시절을 뜻하는 '벨 에포크'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다. 벨 에포크에 사는 5명의 주인공들도 저마다 부침은 있을지 언정 밝고 경쾌한 이십대의 나날을 보낸다. 한예리와 한승연, 박은빈, 류화영, 박혜수까지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그렇지만 여기서 끝났다면 <청춘시대>는 하고 많은 청춘물의 하나에 그쳤을 것이다. 아마도 시청률은 조금 더 나왔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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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청춘시대>는 그저 편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죽음을 메타포로 활용하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애초에 파격적일 수 있는 이 드라마의 설정을 보면, 박연선 작가는 시청률보다 한 편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혼전임신, 스폰서문화, 데이트폭력, 안락사, 허언증, 보험살인... 하나하나 따로 떼어놓고 봐도 9시 뉴스에나 나올 것 같은 심각한 이야기들이 12부작에 불과한 드라마에 모두 등장한다. 이 모든 소재를 관통하는 죽음이라는 메타포까지.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들을 아름답고 경쾌하게 포장한다. 벨 에포크. 이 모든 과정이 그렇게 크게 어색하지 않게 이뤄진다. 이따금 죽음의 과잉이 느껴져 불편하기도 하고, 균형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헤매고 기우뚱하는 것이 결국 청춘의 모습아닌가.


앞서 이야기했던 릿터의 글을 인용한다. 200페이지가 넘는 릿터에서 이 짧은 글이 가장 좋았다. 인터넷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 다들 서점에서 찾아보시는 걸 추천한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청춘을 실감한다. 당신과 당신이 사랑했던 모든 세계가 이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은연중에 깨닫는 일. 알고 있었지만 되새길 필요 없었던 이 박탈감이야말로 청춘에 대해 우리가 품는 향수의 정체다. 돌아올 수 없다. 돌아오지 않는다. 이 감각 속에서 자칫 우스꽝스러운 성장의 일부분일 수 있는 청춘은 다른 무엇보다 특별해진다. 죽음이 모든 가능성을 앗아 간 것처럼, 우리의 가장 빛나던 순간은 이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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