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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an 01. 2024

[올해의 소설]이처럼 사소한 것들

내안의 가장 좋은 부분을 키우는 사소한 것들

12월의 마지막 날이다. 매달의 마지막 날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아닌데 12월의 마지막은 유독 미련이 남는다. 자꾸 올 한 해 이루었던 일들과 이루고자 했지만 여전히 이루지 못한 일들 사이에서 마음이 질척거린다. 이럴 때는 고요히 앉아 책 읽는 시간이지. 하며 연말에 선물 받은 책을 조금씩 넘겨본다. 그리고 남편과 읽기로 했던 오만과 편견도 다시금 펼친다. 그런데 사실 12월 내 마음에 들어온 소설은 클레어 키건의 소설들이었다.


23년의 마지막 독서 모임의 책으로 클레어 키건의 소설들이 정해졌다. 바쁜 12월이라 특별히 얇은 소설로 선정한 모임장의 배려가 무척 고마웠더랬다.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소설은 모두 백 페이지 남짓한 짧은 소설들이었지만 결코 한 번만 읽을 수 없는 소설들이었다. 읽고 나면 계속해서 맴도는 장면들이 생각나 다시 읽게 만들곤 했다. 짧지만 세밀한 묘사와 다 보여주지 않는 주인공의 심리가 자꾸만 상상하게 했고 그 소설 속의 장소로 그 상황으로 들어가게 했다. 여러 소설을 읽고 해석하는 게 나의 일이기도 한데 내내 소설 생각이 맴돌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래는 스포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소설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펄롱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펄롱은 아버지는 모른 채 미혼모인 어머니 아래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가정부였는데 과거 이러한 미혼모들은 행실이 좋지 않다고 하여 내쳐지기 마련이지만, 펄롱의 어머니는 미시즈 윌슨의 도움으로 가정부 일을 계속하며 펄롱을 키운다.

그런 펄롱은 부유하진 않지만 건실한 사람으로 가족을 꾸려나가며 성실하게 생활하는데, 하루는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학대가 의심되는 한 소녀를 보게 되고 끝내는 그 소녀를 구출해 낸다.


펄롱이 소녀를 구출해 나오기까지 갈등하는 모습을 보며, 그저 응원만 할 수는 없었다. 소녀를 구출해 나온 뒤의  펄롱의 어려움이 너무나 그려졌기 때문에. 그러나 펄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소녀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 듯이 더욱 당당해진다. 문득 펄롱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펄롱의 어머니가 미시즈 윌슨에게 받았던 도움 때문에 펄롱은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그건 너무 납작한 생각인 것 같다. 사실 펄롱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펄롱이 받았던 사소하지 않은 무엇들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미시즈 윌슨에게만 받았던 것이 아닐 것이다. 펄롱을 둘러싼 세계가 펄롱을 향해 베푼 친절과 다정함. 안온한 배려 등, 펄롱이 알게 모르게 받았던 그런 사소한 것들이 펄롱 안에서 자라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속한 세계를 돌아본다. 지금의 나를 만든 내가 받아왔던 아주 사소하다 치부되었던, 따뜻하고 조용했던 배려와 친절과 사랑을 떠올려본다. 그 마음들을 받아 성장한 나는 과연 얼마나 다른 이를 향해 돌려보내고 있는가. 내가 차곡차곡 모아 성장했던 타인의 따스함으로 나는 과연 누구를 구하는 시도를 했던가. 하는 생각을 하며 돌아보니 올 한 해 내가 하지 못한 것들이 새삼 나를 스치며 질척대 연말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서 새해가 있는 걸까? 올해 하지 못한 것들, 내가 올해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펄롱의 모습을 통해 내년에는 좀 더 볼 수 있지 않으려나. 기대해 본다. 올해 받은 사소하지 않은 마음들을 잊지 않고 다가오는 내년에는 조금씩 조금씩 타인을 향해 갚는 나날을 만들어 나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나올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이런 평범한 말로 칭찬하는 나 자신 너무 초라하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모두에게 추천합니다아!

<@표지사진은 얼마 전 동네 책방에서 열린 업사이클링 꽃 전시회 사진.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 아름다운 전시회였다. 나 자신에서 나와 타인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이는 새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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