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업무일지를 강박적으로 작성한다. 몇 번 억울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이 자기가 한 일로 둔갑하여 부장에게 보고됐다.
김 과장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이거 누가 처리했어?"라고, 부장이 씩씩거리며 물었다. 평상시 김 과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최 과장은 김 과장이 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부서 업무분장이 있는데, 부장이 그걸 믿느냐고? 간혹 업무분장이 애매한 영역이 발생한다. 보는 사람이 처리하는 업무. 대개 부서 막내들이 알아서 하는 업무지만, 김 과장은 부서 막내보다 조직 내 서열이 낮다. 이 대리가 모르고 한 일은, 김 과장이 자리를 비운 새, 모두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김 과장이 한 일이 되었다.
이 대리는 침묵했다. 부장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진 않으니까.
부장은 김 과장을 불렀다.
"일을 물어보고 처리했어야지. 아직도 이러면 어떡합니까?"
김 과장은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를 챘다. 자기가 안 했다고 하더라도 부장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안 한 걸 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김 과장은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 꿋꿋이 대답했다.
부장은 기가 막혀, 김 과장에게 한마디 했다.
"전 일 못 하는 건 참아도, 거짓 보고하는 건 못 참습니다."
[김 과장의 입장]
차라리 내가 했다고 하는 게 나았을 수도 있어요. 그게 뭐 별일이라고. 그냥 넘어가는 게 나을 수도 있죠. 저도 압니다. 그렇다고 제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너무 고지식하다고요?
"제가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이게 해결이 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내가 뒤집어쓰더라도 그들의 얄팍한 호의, 그것도 자기들 잘못을 뒤집어써서 겨우 구걸하듯 얻은 호의에 기댔어야 했을까요?
김 과장은 아직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부당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고 적극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자신을 조정. 통제하려는 힘에 맞서는 적극적인 저항입니다. 이게 불가능하게 될 때, 분노의 방향은 자신을 향하게 됩니다. 이때 느끼는 감정은 '우울감'입니다.
우울감은 자신을 하찮게 느끼고, 과도하고 부적절한 죄의식을 가지게 합니다. 그 외 각종 심신증(정신신체증)이 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급격하게 체중이 늘거나 줍니다. 소화가 잘 안돼서 속이 더부룩합니다. 별 것 아닌 일에도 과도하게 긴장을 하고 현기증이 자주 납니다. 명확하게 인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몸은 벌써 알고 있습니다. 1)
[부장의 입장]
김 과장, 실망이에요. 큰 데서 왔다고 해서 나름 기대했는데, 사람들이랑 제대로 어울릴 줄도 모르고. 툭하면 자기 업무가 아니라고 방어를 하지 않습니까? 아니, 제가 그게 자기 업무가 아닌지 몰라서 이야기했겠어요? 한번 해보라고 기회를 준 거지. 다른 부원들 바쁜 거 안보입니까? 급여를 나보다 많이 받으면서, 하는 일이 그게 뭡니까?
전 다른 건 몰라도 허위 보고는 못 참습니다. 자기가 해놓고 발뺌이라니요. 솔직히 그 일 누가 했겠어요? 할 일 없는 김 과장이 했겠죠? 거짓말을 그 나이 먹고서 태연자약하게 하다니. 뻔뻔해요. 뻔뻔해.
김 과장 월급이 부장보다 많았네요. 부장은 억울합니다. 김 과장보다 역할과 책임이 무거운데, 그만큼 인정은 못 받았습니다. 부장은 김 과장을 질투하고 있습니다. 질투는 자신에게 왔을 가능성이 있었던 이익이 다른 곳으로 갔을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2)
'김 과장은 월급 값을 못 하는 사람이다.'라는 프레임이 씌워졌습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걸 본다고 하죠? 부장은 김 과장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최 과장의 말만 들립니다.
내 것을 뺏겼다는 감정은 질투에서 혐오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혐오의 심리학적인 정의는 '인류가 진화하면서 터득한, 가까이하면 신체적, 사회적 병해를 입게 되는 대상을 멀리하는 감정'입니다. 저 대상과 가까이하면 자신에게 뭔가 해가 될 거라는 가정이 깔려있습니다. 법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 교수는 ‘혐오’는 배설물같이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전염이나 오염을 꺼리는 원초적 감정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실제로 위험하지 않는데도 자신이 열등하다고 믿는 ‘사람’을 오염물의 일부로 확장하고 투사하는 데 있습니다. 3)
혐오는 자기보다 약자인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아 그 존재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나와 다른 사람의 가치를 평가절하 합니다. '왜곡된 인정 투정'이지요. 4)
사람들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희생양을 정하여 혐오의 감정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이는 ‘따돌림’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부장은 질투심으로 촉발된 갈등이 상대방을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부장이라는 지위를 드러내는 방식일 수도 있겠네요.
미국 평등고용기회위원회(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 EEOC)에서 직장 내 괴롭힘의 잠재 원인이 되는 사업장, 직무 또는 직원별 특성을 11가지로 정리했는데요.
이 중 하나가 “높은 보수를 받는 핵심인재가 있는 경우”입니다. 기술이나 경영의 핵심역할을 담당하는 인재가 괴롭힘 행위자인 경우를 의미합니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기억나시나요? 엄석대는 또래들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좋습니다. 반장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답안지를 얌전히 보여줬으면, 엄석대가 편한 학교생활을 보장해줬을 텐데, 주인공은 그러질 못하지요. 핵심 인물이 대 놓고 괴롭힘과 따돌림을 주도하는 경우, 가해의 정도는 더 심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부장이 가해행위에 동조한 상황입니다.
사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괴롭힘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무리와 동질적인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김 과장은 이 회사에 상대적으로 과스펙으로 보입니다. 해당 인력이 관리자급으로 온다면 조직 내 지휘 체계상 은근히 따돌림 당하는 수준에서 멈추겠지만, 같은 동료로 입사한다면, 그리고 기존 멤버들은 은근하고 교묘하게 넘어서 대 놓고 텃세를 부릴 수 있습니다.
[이 대리의 입장]
어떡하지? 괜히 나서서 했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다니. 김 과장이 뒤집어쓰는 것 같은데 그냥 내가 했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야. 그랬다가 부장님 화내는 건 둘째 치고 선배들을 어떻게 봐. 선배들이 너 뭐냐? 할 거 아니야. 괜히 김 과장이랑 엮이면 좋을 것도 없어. 가만히 있는 게 낫겠지?
이 대리는 동조자입니다. 부서의 막내라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위치죠. 나서고 싶진 않고 마음은 불편합니다. 이런 불편한 마음이 계속될 때, 이 대리는 자신을 질책하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자기 합리화'를 시도합니다.
'김 과장이 그럴만하니까 그런 거야'
이게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리는 사회초년생으로 '집단 정체성'에 자신을 귀의할 가능성이 큽니다. 김 과장은 나와 같은 그룹이 아닌, 나와 무관한 사람이므로 김 과장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대리는 주로 지시를 받는 처지입니다. 권위에 쉽게 복종할수록(복종하는 위치에 놓여 그것이 당연할수록), 자존감이 낮을수록, 다른 사람의 견해에 휘둘리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을 피하려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권위에 쉽게 복종하기 쉽습니다. 밀그램의 복종 실험을 재현한 연구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성실한 사람일수록, 더 강한 전기 충격을 가했습니다. 5)
고문도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따랐던 것입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당신을 위한 제언]
업무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근로자들은 가슴에 사무쳐서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말을 듣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정신과 상담을 시작합니다. 상담기록은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들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업무일지에는 업무만 기록하는 게 아닙니다. 특별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전 기준이 되는 좌측 열에는 30분 단위로 시간을 세팅해두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업무 내용을 기재하는 열, 그 외 잡다한 잡무를 기록하는 열, 그리고 비고란에 ‘직장 내 괴롭힘’ 관련하여 의미 있는 발언 등을 기록합니다. 괴롭힘에 대한 기록 뿐 아니라 관련된 일까지 세세하게 기록할수록 당시의 기억이 현장감 있게 보존됩니다.
엑셀로 기록을 한다면, 내 컴퓨터 비번을 설정해두세요. 해당 내용은 아무리 친한 동료라도 이야기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기왕이면 구글 문서 등으로 클라우드로 보관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이 회사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SNS나 카톡 등으로 업무 시간 외에도 이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기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 과장의 이야기는 Chapter 2 > 2.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에서 이어집니다.
<출처 : Pixabay>
<참고>
1) 나는 왜 그에게 휘둘리는가, 지은이 크리스텔 프티콜랭, p.98
2) 이승현, 월간 참여사회-참여연대(‘19.12.30), “혐오의 시대에서 공존의 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