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점에 대하여
독특하고 단순한 체계와 고도의 상징, 간결하고 단호한 판단, 텍스트 성립과정의 신비, 무엇보다 자연과의 연속선상에서 묘사되는 삶의 전형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역에서 명료한 세계인식과 최적의 처방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 그 존재를 명쾌하게 증명해 보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권위를 지닌 종교적 신처럼, 주역에 대한 기대 역시 그 실증적 효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회자되는 ‘처방 사례(占例)’가 있기는 하지만 열정적 간증이 그렇듯 사적 경험과 확신으로 충만한 후일담일 뿐이다. 주역의 효과성을 옹호하기 위해 전승되는 사례는 오히려 그 처방의 개연성에 의문을 품게 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날 자기 아버지의 병환을 걱정하는 한 남자가 찾아와서 점을 쳐달라고 했다. 점괘는 태괘(泰)로 나왔다. 점술가는 “이 괘는 매우 좋은 괘라오. 아버지의 병환은 금방 나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하늘(乾, ☰)은 상승하고 땅(坤, ☷)은 하강하여 태괘에서는 하늘과 땅이 만나서 길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기뻐서 돌아간 후 북제(北齊)의 유명 점술가 조보화가 점을 쳐준 점술가에게 말했다. “태괘는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소. 그렇다면 아버지(乾)가 흙(坤)으로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어째서 길하다고 하는 거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카나아오사무/김상래, 1999: 81-82)
중국 남북조 시대 동위(東魏)와 북제(北齊)의 역사를 기록한 북제서(北齊書)「방기전(方伎傳)」에 등장하는 이 사례는 당면한 일과 관련하여 주역 점괘를 해석하는 한 방침을 제시하고 있다. 사례에 등장하는 두 점술가는 모두 태괘를 구성하는 건곤 두 괘의 이미지[象]로 점괘를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선택한 이미지는 다르다. 한 점술가는 주역 단전(彖傳)의 설명을 따라 두 괘의 상승하고 하강하는 이미지를 활용했지만, 유명 점술가는 건괘에서 아버지의 이미지를 곤괘에서 땅의 이미지를 선택하여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했다. 결국 아버지는 죽었고 위 사례는 ‘괘사와 역전에 얽매이지 말고 당면한 일에 맞추어 점괘 해석을 위한 이미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방침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례는 ‘아버지의 죽음 여부’와 ‘건곤 두 괘의 이미지’, 즉 점치려는 일과 점괘가 어렵지 않게 연결되는 극소수의 전형적 사례에 불과하다. 처방을 손쉽게 허락하는 점괘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게다가 제한된 수의 이미지 목록과 한없이 다양한 일의 종류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결국 최적의 처방은 점자(占者)의 주관적 해석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 옳고 그름은 오직 결과에 종속된다.
이러한 결과론적 해석에 대한 신뢰성을 논리적으로 합당한 처방이 아니라고 해서 전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삶의 지혜에 갈급한 사람들이 주역에 거는 기대는, ‘주역’ 그 자체가 갖는 검증된 공능(功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문학적 욕망과 늘 새삼스럽게 등장하는 삶의 문제의 무한반복성에 대한 반증이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다.
요컨대, 주역점이란 일련의 절차를 거쳐 점괘(괘효사)를 가려내고, 고민 중인 문제의 범주에서 점괘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융(Jung)의 의견을 확대해석하여 점괘가 개인을 포괄하는 질서로부터 찾아든 신비스러운 정답이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점괘가 해법을 적시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점치는 문제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고도의 상징을 해석하는 과정을 생각할 때, 주역을 읽는 한 방식으로 주역점을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마치 점쳐 얻은 점괘를 대하듯’ 주역을 묵상하라. 마치 기도 끝에 들리는 신의 응답처럼 자신 앞에 던져진 괘사에서 난제의 해법이 선명하게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자신을 포괄하는 보편적 질서로부터 문득 찾아들었으리라 생각되는 해법을 만난다면, 다시 자라나는 욕망을 잠재우고 겸허하게 영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