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이면
꾸밈없는 얼굴과 옷차림이 좋았고, 속에 품은 딴마음이 없어 보여서 좋았고, 해맑은 표정이 좋았고, 솔직하고 투박한 말투가 좋았고, 박자가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장구치고 기타 치는 몸짓이 좋았고, 정의감이 있어서 좋았다. 한마디로, 아내를 보면 웃음이 나와서 좋았다.
그런데 내 마음을 처음 사로잡은 건 아내의 저런 됨됨이가 아니었다. 나는 아내의 당차고 단정한 걸음걸이가 좋았다. 나는 내 걸음걸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의 걸음걸이는 꼭 아내를 닮길 바랐다. 아내는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걸음걸이'라는 것이 드러날 정도로 아이가 클 때까지 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아이에게서 내 걸음걸이를 볼 때마다 잔소리를 했다. 마치 거위 아빠가 거위 아들에게 뒤뚱뒤뚱 걷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 격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잔소리는 필요 없을 만큼 잘 커주었기 때문에 아이와의 관계가 서먹해지지 않기도 했고, 조금은 덜 뒤뚱거리기를 소망하며 잔소리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걸음걸이에 대한 나의 강조가 내 걸음걸이 문제에서 비롯된 것처럼, 모든 강조는 그 강조의 주체가 당면한 문제를 여실히 반영한다. 선악의 갈등을 겪지 않는 순선한 사람은 결코 선을 강조할 수 없다. 악의 유혹을 느끼며 선을 다짐하는 사람만이 선을 강조할 수 있다. 악의 유혹을 더 자주 더 강하게 느낄수록 선에 대한 강조를 더 자주 더 세게 하기 마련이다.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 예수와 부처 또한 태생적인 사랑과 자비의 존재이었을 리 없다. 예수는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느라 끊임없이 기도했을 것이고, 부처는 용서하지 못할 사람을 용서하느라 보리수 아래에서 정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강조할 때는, 마치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성찰하고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