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문제의식이다
2014년, 세월호. 책임을 피하고 결정을 주저하며 명령을 기다리는 데 익숙한 관료적 '배회'와 선장의 '탈출' 모습이 보여주는 선정성 때문이었을까. 크나큰 비극에 걸맞은 전시 효과를 기대해서였을까. 그 해가 가기 전 국회는 만장일치로 인성교육진흥법을 통과시켰다.
어른들이 초래한 비극에 대한 처방으로 학생을 교육하겠다는 뜬금없는 발상에도 불구하고, 인성이야말로 교육의 본령이기도 하거니와 만장일치 법의 부적절함을 따지고 드는 것 또한 부적절한 상황이었던 바, 그 이듬해부터 모든 시·도교육청은 해마다 인성교육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난 10년 동안 각 시도의 교육청은 두 가지 과제를 부여받았다. 교육과정이 아니라 별도 법령으로 강제된 인성교육이라는 애먼 일을 하게 된 경위야 어떠하든, 그래도 하나 마나 한 일이 되지 않도록 매해의 계획을 잘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 그 첫 번째 과제이고, 두 번째 과제는 그 일을 하게 된 이유, 즉 세월호의 비극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과제는 사실,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과제가 조직의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망각과 관성은 인간, 특히 관료적인 조직이 빠지기 쉬운 치명적인 함정이기 때문이다. 세월호에 대한 조직의 기억도, 하나 마나 한 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조직적 동기부여도, 처음과 같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일을 하든지 왜 하는지 따져 묻지 않고 그냥 하던 대로 해치워 버리듯 하지는 말아야 한다.
모든 정책은 현실의 문제 상황을 개선하려고 만들어진다. 그 문제의식에 대한 긴장감은 정책의 방향성과 동력을 유지시켜 주고 여전한 유효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정책이 일단 시행되고 나면 이내 문제의식은 망각되고 관성적인 정책만 화석처럼 남기 십상이다. 게다가 존재 자체가 목적인 양, 정책이 자기비판에는 인색하고 억지 성과를 강조하며 확장을 지향할 때 - 이런 현상은 보통 태생적으로 신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정책을 신념으로 삼는 사람들의 욕망이 결합되었을 때 나타나는데 - 정책은 변화하는 현실에 맞게 적절히 변모하는 창의적 모습을 잃고 경직되면서 현실과 괴리된 채 부유하거나 도리어 현실을 왜곡시킨다.
이는 인간의 모든 정신적 기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종교의 형식주의와 기복적 세속화가 그렇고 사상의 경직화, 교조화가 그렇다. 관료 조직의 상명하복과 군림의 문화가 그렇고 정책이 실제에서 멀어지고 활자만으로 자족적일 때가 그렇다. 결국은 도구로 선택된 것이 문제의식이라는 뿌리를 죽인다.
그러나 망각과 관성이 아무리 고질이라 하더라도 아침마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해질녘에는 멈춰 서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조리듯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가의 메신저, 교육청 관리를 영접하기 위해 학교를 쓸고 닦으며 명을 받들 준비를 하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유신시대의 전체주의적 방식으로 문제의식은 존재할 수 없다. 망각이나 관성과는 또 다른, 주입이라는 방식으로 문제의식을 죽이는 일이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개인적, 조직적 차원에서 끊임없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의심되어야 한다.
문제의식에 수반되어야 하는 이러한 긴장감 때문에 문제의식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정책으로 구현하는 것도 어렵지만, 공동체 구성원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갱신하기는 더욱 어렵다.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선결 조건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개인의 주체성이다. 자의적, 타의적으로 소외된 개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이미 공동체가 아니라, 독재자나 특정 목적에 봉사하는 기계적 조직이거나 행정 편의상 분류된 조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주체성으로 충만하더라도, 개인의 의사를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 나누는 문화가 없이는 공동체 차원의 문제의식은 존재할 수 없다. 자유로운 소통의 문화는 그 두 번째 조건이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공동체의 민주적 운영이라는 세 번째 조건 또한 충족되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의 의견이 동등한 무게로 검토되고 공동체의 의견으로 수렴되어 가는 민주적인 시스템이 없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소외된 개인을 낳고 공동체성이 살아있는 조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지난 10여 년은 위기의 추상성이 구체화되는 시기,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누군가 부르짖던 위기가 어느새 모두의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된 시기다.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미래라는 말이 소풍처럼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되었다. 바야흐로 문제는 더 크고 무거워졌으며 아무도 정답을 제시해 줄 수 없는 각자도생의 시기가 도래했다. 이러한 시대의 고민은 본질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교육이 천착해 온 문제의식도 그렇다. 지역 안에 섬처럼 존재하는 학교, 학생의 교육적 삶의 공간이기보다는 수용을 위해 설계된 표준화된 학교 건물과 교실, 교과목이라는 주머니에 전수해야 할 지식과 경험을 빼곡하게 담아놓은 교육과정, 교육과정을 요령 있게 전달하는 교사, 학교를 관리감독하는 교육청, 동일한 정책 대상을 두고도 소통하고 협업하지 않는 일반행정과 교육행정, 어른의 가르침과 결정을 수용하고 순응하는 것이 미덕인 학생, 그 미덕을 발휘한 동일 잣대 경쟁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점수, 입시로 수렴되는 경쟁 구도에서 생략된 학생 한 명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론적 특성, 교육에서 소외된 열패감에 젖은 학교 안팎의 아이들, 공교육 상품의 수요자가 되거나 수동적 협력자가 되는 것 외의 역할 선택지가 없는 학부모. 요컨대, 우리가 경험해 온 근대화와 산업화 시대 공교육의 전통적인 요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지난 10년을 관통해온 문제의식이었다.
기후위기로 임박한 재난, 전쟁, 혐오,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 AI라는 초월적 지성의 출현, 학령 인구의 급격한 감소. 어제의 문제의식은 오늘도 여전히 적절하고 중요한 것인가? 이것은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마땅히 던져야 하는 질문이며, 서로가 각자위정하지 않도록 공동체 안에서 함께 답해야 하는 일이다. 이 일은 건강한 공동체의 징표이기도 하고, 그 집단적 고민 과정 자체가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이 문제의식이 존재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