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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Nov 02. 2022

브런치에 달린 댓글

너와 나의 연결고리


“띠링-!”


남편과 북한산에서 템플스테이를 마친 후 산을 내려오는 길에 핸드폰이 울렸다. 브런치에 올린 글에 댓글이 달린 글은 ‘너는 시집살이 안 해서 참 좋겠다.’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십 분간 멈춰 서야 했다.


사실 시집살이에 대한 글을 쓰기 전까지 고민이 많았다. 한국의 시집살이를 겪어보지 않은 내가 써도 되는 걸까? 이래저래 해도 시부모님이 정말 마음을 써주시는 걸 알면서 뒤에서 이런 글을 쓰는 건 어쩌면 괘씸한 일 아닐까? 하나의 글도 독자의 수만큼 다르게 해석된다고 한다. 독자가 천명이라면 하나의 글도 천 개의 다른 글로 읽히는 것이다. 브런치에서 시집살이 글을 접한 사람은 지금 시점으로 700명 정도이다. 이 글은 브런치뿐 아니라 독일 한 커뮤니티에도 공동 연재되었고, 얼마 안 있어 디지털 매거진에도 게시되었다. 따라서 어림잡아 천명 정도의 사람이 글을 읽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다르게 읽힐 수 있음에도 끝내 담아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구상하는 이야기가 당신의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를 쓸 필요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글을 처음 쓸 수 있게 용기를 준 구절이다. 2년 전 나는 마음과 머릿속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집살이 글은 고민이 많았던 만큼 아픈 곳을 건드리는 글이었다. 그리고 그런 글에 댓글이 달린 것이다. 댓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나는 당시 일 년 전 내가 글을 썼던 이유와 그 동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로,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가부장>과 연관된 일이기 때문이다. 모순되게 들릴 수 있으나, 나는 친정보다 시댁이 편하다. 시부모님은 나에게 ‘기대’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불편했던 것은 ‘딸’로서 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딸이었다. 그에 대한 벌로 ‘너는 성격이 너무 예민해’, ‘너 표정이 그게 뭐니?’라는 말을 매일 같이 듣고 자라야 했다. ‘아니 딸이 되가지고…’로 시작되는 말 뒤에는 다양한 동사와 형용사와 목적어가 비난의 어투와 함께 어우러지곤 했다.


두 번째로는 한국에서 자라오며 내면화한 가부장의 모습이 10.000 km 너머 시댁에서 발현되어 버리게 된 것이다. 나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면적으로 아주 깊고 어두운 청소년기를 겪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부장적 집안 분위기에서 주어진 딸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그러나 가부장 사회와 가정에서 자라며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면서도 체화한 것들이 많았고, 스스로 가정을 꾸리고 나자 나의 내면 가부장이 긴 동면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시드라 레비스톤의 책 <내 안의 가부장>에서는 내면 가부장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딸에게 물려주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어머니들은 딸뿐만 아니라 아들에게도 여성의 역할과 의무에 대해 직접 역할 모델이 되거나 때로는 자신이나 다른 여성들의 행동을 평가하며 이를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의 예시를 보여주기도 한다.** 나 또한 엄마가 가정에서 맡은 역할과 책임 또는 희생을 곁에서 지켜보서 자랐다. 겉으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부정하면서도 남편이 퇴근할 무렵에는 늘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았고, 저녁밥이 준비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꼈으며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집안 무언가에 대해 지적하면 마치 잘못한 어린아이처럼 당황하곤 했다. 때로는 남편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그냥 알았다. 나는 남편과 시부모님의 마음을 지레짐작하고 ‘직접적으로 말은 안 해도 사실은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원할 거야’하며 스스로를 시집살이의 궁지로 몰곤 했다.




이렇게 며느라기와 가부장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는 아직 끝맺음을 맺지 못한 이야기이다. 그런만큼 더 일상에서 자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주제인 것도 사실이다. 시집살이 글을 브런치에 올린 뒤 얼마 안 있어 우연하게 한 디지털 매거진에 글을 기고할 기회가 생겼다. 매거진이 발행된 후 얼마 안 있어 다시 담당자에게 연락을 받았다. ‘시집살이라는 키워드가, 국경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그리고 타향살이라는 마무리가 해외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울림을 주었다’고 했다. 살풀이로 시작한 글쓰기가 다른 사람에게 울림을 주었다는 말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실제로 시집살이 글은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웠던 며느라기 시절을 인식시키는 촉매제가 되었고 친정에서도 서러운 기분이 들게 했던 가부장의 흔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관습이라는 이유로 한 개인을 옥죄어 온다는 것이 두 가지를 이어주는 가장 큰 고리이고, 그 안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게 부차적인 고리이다. 나의 부모님과 시어머님을 바꿀 순 없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상황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크고 오래된 고리에 달려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 또한 언젠가 무의식 중 다른 사람에게 가해자가 되기 전 이를 의식적으로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변함없이 달려있는 질긴 고리를 마침내 끊어버리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는 것은 나의 몫이다.


사실 그 댓글은 악플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훈계에 가까웠달까. 댓글을 읽는 동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미상의 브런치 독자에게 어렴풋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결국 댓글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라, 불편한 것이 있다면 참고 또 주어진 상황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라. 그리고 그저, 침묵해라.’ 2017년 ‘미투 운동’은 성폭행이나 성희롱을 당한 여성들이 마침내 침묵하지 않고 그 상황을 수면 위로 올리려 한 목소리의 결집이었다. 하나의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에게 힘을 주었고 권력의 뒤에 숨어있었던 가해자들에게 약자들이 ‘침묵’만 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렸다. 가해자들이 만들어 온 단단한 고리가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댓글에 힘을 받아 앞으로도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부당함의 단단한 고리를 끊고 약자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내가 써 내려가는 한 글자는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시댁에서 집안일을 할 때 나는 남편에게 함께하자고 한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던 시어머니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듯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뵙던 시댁 방문 횟수도 줄였다. 남편이 시부모님을 보고 싶어 하면 나는 잘 다녀오라 하고 마음속 죄책감을 의식적으로 지우며 자유시간을 보낸다. 한국말을 하지 못해 피하기만 했던 친정식구와의 전화에 이제 남편은 서툰 인사말이라도 전하려 한다. 자신의 부모를 매주 찾아뵙는 것도 모자라 음식까지 해가야 했던 나의 마음을 전한 후, 그의 마음도 변했기 때문이다. 시댁 식구들의 생일파티에 갈 때도 예전처럼 혼자 음식을 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음식을 하고 남편은 케이크를 만들거나 요리를 한다. 물론 행동과 관계가 변하는 이 모든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불편하게 느끼는 것들을 말로 표현하기 전까지 남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자 서운함도 느꼈다고 한다. 나 또한 불편함을 표현하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내가 참으면 모든 사람이 행복할 텐데 괜히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싶은 내면의 가부장과 며느라기가 나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누군가가 ‘참는다’는 것에 있다. 참고, 침묵하고 억누른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남편과 십 년간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이유도 우리 관계가 매일 그리고 매 순간 변화하고 있어서라 믿는다. 욕심을 부리자면, 나는 부부관계 뿐만 아니라 부모와 시댁 그리고 물론 친구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지금처럼 늘 변화하기를 바란다. 어떤 관계든 변화하지 않는 그날, 인연의 끝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변화의 동력은 침묵과 강요가 아니라 대화와 소통이다.





*제임스 스콧 벨, <소설 쓰기의 모든 것 1: 플롯과 구조>

**시브라 레비스톤, <내 안의 가부장>


그 외 함께 읽은 책

해날, <며느리는 백년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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