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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May 04. 2022

옷장 정리

헌 옷에 묻은 기억들

옷장을 열 때마다 늘 나를 노려보는 옷들이 있다. 아무 소리를 내지는 않아도 나는 알고 있다. 그 옷들은 서랍장 안에 빛이 들어올 때마다 마치 갚을 돈을 기다리는 빚쟁이처럼, '도대체 언제야 나를 세상 구경시켜줄 것이냐!' 하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는 것을. 괜한 죄책감에 옷을 집어 올려 고민을 해봐도, 나는 이내 그 옷을 내려놓게 된다. 이 옷을 입고 나가면 오늘의 내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다른 옷을 집는 것이 마땅해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무엇을 입을까 둘러보자 어떤 건 희미하게 보이는 얼룩 때문에 또 다른 건 심하게 일어난 보풀 때문에 심지어는 오늘의 온도, 습도 또는 바람의 세기와 맞지 않아서 포기를 한다. 그러면 그 옷들은 다시 무기징역을 사는 죄수들처럼 옷장 안 어둠에서 네 번의 계절, 다섯 번의 생일파티, 두 번의 휴가가 지나갈 동안 묻혀있게 된다.


독일에서는 옷을 잘 사지 않는다. 한국처럼 유행에 맞춰 옷을 정기적으로 사지 않아도 되고, 그만큼 꾸미고 다닐 일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노려보는 대부분의 옷들도 한국에서 구입한 옷들이다. 그래서 그 옷들의 소매와 어깻죽지 한편에는 한국에서 만든 추억이 얼룩처럼 묻어있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추억도 있지만 떠올리기 힘든 기억들도 물론 함께이다. 흔히 사람들은 말한다, 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자신들이 조국을 떠난 그 시절에 멈춰있다고. 자신이 떠나온 곳의 세상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만, 떠난 이들은 그 변화를 함께 겪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옷들에한국을 떠나온 당시 기억들이 생생하게 담겨있는 듯하다. 벅벅 문질러 빨면 얼룩은 조금이나마 희미해져도 기억은 쉽게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지우려 할수록 선명해질 뿐이다.


독일에서 나는 한국을 추억한다. 어떤 일은 안개 낀 들판 위 꽃들처럼 그 모습을 정확히 헤아리기 힘들지만 어떤 것은 수년이 지났어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은 그 이유는 달라도 모두 마음을 저미는 것들이다. 사랑했던 사람, 미워했던 사람,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 그리고 그리운 얼굴들. 봄이 오던 광화문의 향기와 캠퍼스 앞 찬란했던 저녁노을 따위가 끝나지 않는 영화처럼 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때 너는 왜 그런 말을 해야만 했을까, 나는 왜 다르게 행동하지 못했나. 한국에 대한 기억들은 모두 끝을 낼 수 없는 결말들로 점철되어 있고, 그것들은 옷장 속 좀처럼 나의 정신 한구석을 야금야금 베어 먹고 있는 것이다.


옷장 정리를 하다 보니 지나간 취향과 새로운 취향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며 놓여있었다. 과거의 나는 무채색 옷을 주로 입었고 요즘의 나는 자연을 닮은 색을 좋아하는 듯했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서, 얼굴색을 칙칙하게 만들어서 또는 너무 튀어서 입지 않았던 색깔의 옷들이 옷장에 놓여있다. 새 옷과 헌 옷들을 골라내어 보니 그 차이는 더 선명하게 보인다. 요즘 나는 아마도 어울리지 않아도, 또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상관없이 그저 내가 좋아하는 색을 찾기 시작한 듯했다. 창고에서 제일 큰 봉투를 가져다 헌 옷들을 쑤셔 넣었다. 이미 깨끗하게 세탁을 해두었어도 지나간 기억들이 군데군데 오물처럼 묻은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다. 빨리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한 손으론 봉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옷들을 집어 욱여넣기 시작했다.  봉투는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기억의 파편이 한 곳에 모여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말과 감정, 상처와 추억들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마치 내 마음속 같았다.


다시 봉투를 뒤집어 옷들을 쏟아내었다. 그리고는 옷들을 하나씩 펼쳐서는 차곡차곡 개기 시작했다. 하나씩 갤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마웠어’, 그것은 한 조각의 옷에게 하는 말뿐일지라도 나는 내 기억 속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마음이었다. ‘나와 함께 그 시간을 보내주어서 고마웠어’ 그리고 ‘잘 가’.


옷을 하나씩 개어서 다시 봉투 안에 차곡차곡 쌓아 놓으니, 터질 것 같던 봉투는 전과 달리 사이사이 공간이 남게 되었다. 옷가지가 줄어든 옷장에도 드디어 바람이 통하는 듯했다. 그리고 마음에도, 머릿속에도 공간이 생겼다. 또다시 그 안에는 새로운 바람, 새로운 사람 그리고 새로운 추억들이 쌓이겠지.


고마웠어, 그리고 잘 가!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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