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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Apr 20. 2022

같은 얼굴

여자 아이를 대하는 다른 방법


“너 이제 독일 사람 다 됐구나?”


삼 년 전 한국에서 오랜만에 대학교 동기들을 만났을 때 일이다. 스포츠 의류 회사에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그녀의 옷차림은 제법 화려했다. 비닐 재질의 짧은 치마는 타이트하게 그녀의 몸에 맞았고 밝은 색 상의는 그녀의 구릿빛 피부를 예쁘게 밝혀주었다. 게다가 메이크업은 진하지는 않았지만 결점하나 없는 피부 표현으로 꾸안꾸 패션을 완성한 듯 보였다. 그녀는 길을 걷다 마주치면 돌아보는 것은 물론 한동안 뒤통수에서 눈을 떼지 못할 미녀였다. 그녀의 말에 나 대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제인이는 이제는 진짜로 독일 사람 같아 보여.”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에 품이 넓은 카디건을 걸치고 온 다른 동기였다. 하의로는 스키니진을 입어 실루엣이 부해 보이지 않게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그녀메이크업 또한 진하지는 않았지만 눈두덩이엔 당시 유행했던 은은한 음영이 들어간 아이쉐도우를 바른 것이 화사해 보였다. 분홍색으로 빛나는 글리터는 노란빛이 감도는 그녀의 피부톤을 보완하면서도 잘 어우러져 보였다. 순간 두 사람 모두 내 얼굴과 옷차림을 빠르게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독일 사람’ 같아 보인다는 나는 줄무늬 카디건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차림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 사람이 독일에 몇 년 살았다고 ‘독일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그녀들은 <너는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그날 입고 온 옷은 모두 한국에서 새로 산 것이었고 그날은 독일에서와 달리 오랜만에 공 들여 분칠도 했었다. 이제는 아무리 꾸미려 해도 이미 독일 생활에 동화된 것은 아닐까? 그녀들의 말에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난 설렘은 금세 사라지고 어딘가 지적을 받은 것 같아 억울한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지만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온 터라 나는 매콤한 국물과 함께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서 지내다 한국을 방문하거나, 한국에서 지내다 다시 독일로 가게 되면 실제로 사람들의 옷차림이 지내는 곳에 따라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하고 독일 사람들은 기능성에 집착한다. 특히 사계절 기능성 옷만을 입고 다니는 독일 사람들을 보자면, 이것이 다 독일의 궂은 날씨 때문이겠거니 하다가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역동적 이기론 한국의 기후변화가 정도가 더 심하다. 예를 들어, 나의 고향에는 봄바람과 함께 매서운 꽃샘추위가 찾아오고, 따뜻해진다 싶다가도 여름에는 한밤 중에도 30도를 훌쩍 넘는 열대야가 이어진다. 그리고는 이내 마치 하늘에 큰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세찬 장맛비가 한 달 가냥 끊임없이 쏟아진다. 다시 가을이 찾아와 파란 하늘 아래 단풍놀이라도 가려고 하면 금세 시베리아에서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친다. 그리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오는 패딩을 입지 않으면 도저히 편의점 조차도 갈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겨울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 혹독한 기후 아래에도 한국 사람들은 여름에는 셔츠를, 겨울에는 미니스커트를 입는다. 게다가 환승시간을 지키기 위해 뜀박질을 할 수밖에 없는 출근길에도 엉덩이에 딱 붙는 펜슬 스커트와 하이힐을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주 52시간 근무라는 허울 속에 사실 주 60시간은 훌쩍 넘게 일하면서도 출근길에는 풀메이크업을 하고 퇴근길에는 화장품 할인점을 들려 마스크팩을 사 간다. 아니 한국 여자들은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나 또한 이 멋쟁이들의 나라에선 흔들리는 고속버스 안에서도 완벽하게 화장을 할 수 있었고, 조그만 핸드백 속에 구두를 넣어 다니면서 지하철 한구석에서 구두를 갈아 신는 마법을 부렸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꾸미는 것을 특별히 좋아한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어머니가 공을 들려 머리를 땋아줘도 등굣길에 모두 헝클어트려야 직성이 풀리는 말괄량이 소녀였다. 친구들이 S.E.S 언니들을 따라 하겠다며 한껏 꾸미고 다닐 때에도 나의 옷차림은 H.O.T에 가까웠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치마를 입으면 놀이터에서 뛰어놀 때 불편했기 때문이고 머리를 묶으면 땀이 잘 마르지 않아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노을이 지는 놀이터에서 머리카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말릴 때의 시원함은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놀이터에서 함께 뛰어놀던 여자 친구들은 교실 뒤편 거울에 모여서 고데기, 실 끈 등으로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기고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옷차림에 신경을 쓰긴 했지만, 아직은 아이였다. 편한 것이 가장 좋았다. 친구 중 한 명은 나의 머리를 뒤로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제인이도 꾸미면 예쁠 텐데.”


엄마는 이런 나를 가리켜 ‘보이쉬’하다고 말했다. “얘는 마치 지 오빠처럼 하고 다닌다니까요. 아주 천방지축이에요.” 엄마와 함께 마트를 들렀다 이웃에 사는 아줌마를 만나게 되는 날에는, 엄마는 부끄러운 듯 나를 뒤로 살짝 밀어 넣으며 말했다. 사실 엄마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엄마는 나를 어릴 적부터 <공주>처럼 꾸며주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었기 때문이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엄마에겐 아마도 새 옷을 가져본 일보다 언니들의 옷을 물려 입는데 익숙했을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의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해 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사진 속 나는 레이스가 달린 치마를 입고 총천연색 머리띠를 했음에도 엄마의 소망처럼 ‘공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늘 동네 오빠들과 뛰어노느라 무릎에는 상처가 끊이질 않았고 머리핀과 머리띠를 싫어한 탓에 머리는 늘 산발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불편한 옷을 유난히 싫어했는데, 어릴 적 유치원 발표회 사진 속에는 하얀색 드레스를 입었지만 억울한 표정과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가득한 어린 내가 있었다. 공주옷은 발표회에 참가하는 여자아이들 모두가 입어야 했는데, 끝까지 울면서 거부하는 나에게 엄마가 애원하듯 호통을 치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예쁜 여자 아이들이 부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수줍은 성격에 소녀다운 옷차림을 한 여자 아이들은 정말이지 타고난 공주처럼 보였고, 당연하게도 남자아이들로부터 인기도 많았다. 그러나 모두가 공주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얌전하게 십자수를 놓거나 구슬 반지를 만드는 것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공주처럼 옷을 입고 학교를 갔다가는 옆반 친구들과 한발 뛰기를 하거나 말뚝밖기를 할 수도 없었다. 한편 그런 나에게 ‘보이쉬’를 떠나 진짜 ‘보이’인 남자아이들은 정말 자유로워 보였다. 한바탕 축구를 하고 땀에 흠뻑 젖은 티셔츠를 머리 위로 말아 올리고는 수돗가에서 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씻는 아이들은 딱 그 나이 아이들이 누릴 자유를 온몸으로 흠뻑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한국은 여자 아이들이 입고 싶은 대로 놔두는 사회는 결코 아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수능을 볼 때까지의 6년 동안 나는 강제적으로 매일 치마를 입어야만 했다. 한 여름은 물론 한 겨울에도 말이다. 사실 한국 여자들이 한겨울에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시베리아 칼바람이 불어오는 거리를 활보하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이 훈련의 산물은 아닐까? 자고로 한국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라면 마땅히 만 12살부터 기록적인 한파를 기록한 날에도 무릎을 겨우 덮는 치마를 입고 견디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을! 누군가 이렇게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도 치마는 입다 보면 적응이 되었다. 스타킹 위에 기모 스타킹을 한 겹 더 꼼꼼히 신고 속바지나 속치마를 잘 챙겨 입으면 웬만한 추위는 견딜 수 있다는 것도 금방 배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적응하기 힘든 것은 교복 상의였다. 보통의 교복 상의는 줄이지 않아도 허리선 바로 아래에서 끝나는 정도였기에 말뚝밖기는커녕 맘 편히 밥을 먹기에도 불편한 정도였다. 급식을 먹고 나면 뽈록 튀어나오는 배를 숨기기 위해 하루 종일 힘을 주고 있어야 했고 그러다 보면 하교 때에는 배에 가스가 차올라 내내 더부룩했다. 그 덕에 사춘기 시절 교복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데다 학생들의 편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만들었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지만 고등학교 졸업을 할 때까지 이 족쇄, 아니 교복을 벗을 수는 없었다.




교복을 벗은 지 몇 달 후 나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정규 강의가 시작하기도 전에 열린 신입생 환영회에는 재학생 말고도 졸업한 선배들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신입생 중 유독 외모가 눈에 띄게 예쁜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익혀야 할 신입생, 재학생들보다는 앞으로 볼일이 없을 졸업생 선배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어제만 해도 남이었던 사람들 손에 이리저리 붙들려 다녔다. 그리고 그 모습은 묘하게도 티브이에서 본 한 장면과 매우 닮아있었다. ‘나이트클럽’이라는 곳에서 부킹을 당하던 여자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2차로 자리를 옮기자는 과대표의 우렁찬 목소리에 그 모습은 머릿속에서 이내 지워져 버렸다. 신입생 환영회는 3월 한 달 내내 이어졌다. 같은 해 신입생 들은 주로 과실에서 약속 시간을 기다리며 모여있었는데, 그동안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화장을 고치거나 옷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후로 4년을 다니게 된 디자인과에서는 학교에 남아 야간작업을 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밤을 꼴딱 새우고 마친 과제를 뒤로하고 한 숨을 돌리려 화장실에 가는 복도에서 남자 학우를 만나면 종종 이런 소리를 들었다. “너 화장 안 했어? 예의가 참 없구나?” 졸린 눈을 비비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물론 그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례한 그의 말에 대한 분노보다 화장을 하지 않은 나의 얼굴에 대한 수치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과제에 대한 혹평을 들을 때도 이런 수치심은 들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잽싸게 대학교 앞 번화가로 뛰어나가 화장품 가게에 들러 수없이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친 샘플들로 얼굴에 구색을 맞췄다.


물론 독일의 여학생들이 화장을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 풀메이크업을 하고 또각 구두에 자그만 가방을 메고 오는 여학생도 있고, 반면 레깅스에 운동화, 배낭을 메고 등교하는 학생도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맨 얼굴에 기능성 점퍼, 장화를 신고 오는 여학생도 있다. 다만 한국과의 차이점은 “너 화장 안 했어?”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외모나 옷차림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는 것에 족하다. 지적, 비난, 비교를 하는 것은 예의 없는 행동이라는 것은 이곳의 어린아이들조차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보다는 화장이나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에선 잘 꾸미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던 내가 독일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엔 늘 꾸미는 학생 축에 들었다. 어느 날 독일 여학생들 두 명과 팀 과제를 하던 도중 우리는 잡담을 하기 시작했고 한 학생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매일 화장을 하니?” 나는 그렇지는 않지만 학교에 올 때는 시간이 있다면 화장을 한다고 했다. 그녀는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피부결이 마치 아기 같았다. 같은 질문을 되돌려 주자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화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사실 난 살면서 한 번도 화장을 해본 적이 없어.” 수면 위에 작은 돌이 떨어지듯 조용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사 년 전에 들은 그 대답은 아직도 나의 머릿속에 파동을 남기고 있다. 한국 여자 중 서른이 다 되도록 한 번도 화장을 해보지 않은 여자는 몇이나 될까?  


다시 이야기는 십 년 전 한국으로 돌아간다. 대학시절 종종 강의가 끝나고 함께 술을 먹던 무리가 있었다. 어느 대학가의 술자리가 그렇듯 자리의 없는 사람의 이야기, 수업 이야기, 교수들 이야기 등 두서없는 화제들이 이어졌다. 친목을 위한 자리라기보다는 그저 술을 마시기 위한 구실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개강 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터라 ‘누가 어디를 고쳤다더라’라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제는 갑작스레 나의 턱으로 옮겨갔다. “제인이는 그래도 양악 하지 마” 그들 중 한 명이 선심을 쓰듯 말을 했다.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한 살 많은 여자 선배는 날아오는 탁구공을 잽싸게 받아치듯 말을 이었다. “그래, 너 같은 턱이 부자 되는 턱이라더라. 괜히 손댔다가 복 날아가니까 수술은 하지 마.” 그날 얼큰히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온 나는 세수를 하다 유심히 거울을 보았다. 한 번도 나의 턱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터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날 나는 나의 턱을 처음으로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갑자기 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술기운 탓이었을까? 거울을 바라보다 이상한 절망감에 눈물이 흘렀다. 물론 그 후로 턱 수술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나의 턱을 노려보곤 했다. 그날 술자리에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말이다.  


그로부터 오 년이 흐른 어느 날 독일, “제인, 너는 참 입술이 예뻐.” 남편의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던 중 한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정말? 내 입술이? 나 한 번도 입술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 나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나는 마치 내가 잘못이라도 한 듯 변명하듯 받아쳤다. “그럴 리가!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네 입술이 딱 눈에 들어오던걸?” 한 여자 친구가 나 대신 나의 입술을 변호하듯 말했다. 그 후로는 거울을 볼 때 턱보다는 입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같은 얼굴을 보고도 <양악 수술>을 떠올리는 사람과 <도톰한 입술>이 예쁘다며 칭찬하는 사람 그리고 그들이 속한 사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얼굴은 그저 그들의 사고를 비쳐주는 거울이었다.



한국에 가는 것은 매번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10시간 동안의 비행은 너무나 고역이어서 ‘아니 젊은 지금에도 이렇게 힘든데,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한국에 어떻게 가지.’하며 때 이른 고민을 하게 한다. 그렇게 한국 집에 도착하면 정말이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무겁다. 잠시 눈을 붙이고 있으면 저녁시간에 맞춰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시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내가 한국에 올 때마다 그날 저녁은 외식을 한다. 몹시 피곤했지만 나는 부모님과의 저녁식사를 위해 얼굴을 깨끗이 씻고 단정한 옷을 입고 거실에 나갔다. 방금 전까지도 밖에서 일을 하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오랜만에 본 나의 얼굴을 낯선 듯 쳐다보다가 이내 한마디 한다. “너 화장은 안 하니?” 잠시 후 집에 도착한 친오빠는 물론 화장을 하지 않았다. “우리 아들 일하느라 피곤했지? 뭐 먹을래?” 한국에서의 첫 식사에는 언제나 씁쓸한 맛이 섞여있고 나는 ‘아, 한국에 돌아왔구나’하며 곱게 화장한 얼굴로 저녁을 먹는다.


그 후 다시 돌아온 독일은 봄꽃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남편과 오랜만에 나들이를 가기로 한 날, 따듯해진 날씨에 들뜬 나는 독일에서 새로 산 청바지를 입었다. 적당한 허리품에 발목까지 잘 맞는 기장의 바지는 나들이 가는 마음을 더 들뜨게 만들었다. 청바지는 한국에서 즐겨 입던 바지와는 조금 달랐다. 몸의 실루엣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일자바지는 뛰기에도 쪼그려 앉기에도 편해 보였다. 현관에는 며칠 전 남편이 깨끗하게 닦아준 운동화가 나를 기다리며 놓여있었다. 남편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으려고 나는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고 가방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외출 준비를 마친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게 다였다. 그럼 나는 걱정스럽게 그에게 묻는다. “나 화장 안 했는데 괜찮아?” “너무 예쁜데?” “화장할까?” “하고 싶어?” “아니.” “그럼 뭐가 문제야?” “문제없어.” 우리는 그렇게 외출을 한다.  


공원에는 여자 아이들 남자아이들이 섞여 강아지와 함께 뛰어놀고 있었다. 소매와 엉덩이 어디 하나 깨끗한 곳이 없었지만, 아이들은 노란 수선화와 연분홍 벚꽃이 어우러진 공원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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