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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Mar 15. 2023

7. 말라가는 살아있다

스페인 남부 여행의 첫 도시 말라가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들어설 때면 동그란 작은 창문을 통해 영종도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과 바다 사이 흐릿한 경계에 어선 몇척이 떠다니는 곳을 비행기는 유유히 가로지른다. 이어서 회색 활주로에 들어서면 마음속 여러가지 감정도 함께 착륙한다. 반가운 얼굴들을 곧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한식에 대한 갈증이 곧 해소될 거라는 설레임 뒷면에는,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불편함이 섞여있다. 이 작은 땅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겪고 느꼈기에 이 감정들은 매번 이렇게 함께 귀국하는 것일까. 한편 다시 독일행 비행기에 오를 때에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까지나, 어딜가도, 어디에든 속할 수 없다는 공허한 마음이 묵직한 짐짝처럼 함께 이륙한다.


이방인으로 살아온지 근 십년, 한국도 독일도 모두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여행이 아주 간절해 진다. 눈을 바라봐도 사람들의 속내를 알 수 없고, 억양을 들어도 그 사람의 배경을 알 수 없는 곳으로의 도피가 절절해지던 그 날, 나는 스페인 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렇게 지도 위에 말라가(Málaga), 론다(Ronda) 그리고 그라나다(Granada)를 잇는 삼각형이 그려졌다. 스페인 남부 세도시를 일주일동안 돌아보는 여정은 그리 지루하지도 무리하지도 않아 보였다. 여행보다는 휴양을 좋아하는 남편은 삼각형 각 모서리를 시큰둥하게 바라 볼 뿐이었다. 간간히 “여기서 기차를 탄다고?”, “그 다음 도시가 어디라고?” 정도의 짧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마저도 절반은 내 대답을 흘려듣는 눈치였다. ”같은 돈이면 스페인령 섬에 가서 일주일간 늘어지게 쉴수 있는데…“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내 표정을 본 것이다. 휴양보다는 경험이, 쉼보다는 삶이 절실했던 나는,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조금 고집을 부려보고 싶었다.


스페인에 가면 모든 것이 다를거야, 따뜻한 날씨와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이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말라가에 도착한지 이틀째 나는 실망한 채 한 레스토랑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들은 이미 고향을 떠난 뒤였고 태양의 해변을 찾는 관광객도 많지 않았다. 마치 도시 전체가 소라게가 남기고 간 빈 껍데기 같았다. 바르셀로나처럼 활기차지도, 파리처럼 웅장하지도 않은 도시에서 나는 어떤 삶과 경험을 기대했던 것일까? 번화가엔 그저그런 상점들과 대형 은행들 그리고 싸구려 기념품 가게들만이 즐비했고, 유명하다는 음식점은 한발 빠른 관광객들로 가득차 버린 뒤였다. 먹구름처럼 둥둥 떠나니던 실망감이 마침내 비가 되어 내린 것도 인터넷에서 본 유명하다는 식당이 아닌, 그 바로 옆의 식당으로 타협을 해야했을 때였다. 음식은 실망스러웠고 가격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골목에선 역한 냄새가 났고 바로 건너편엔 걸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작은 강아지와 함께 길바닥에 주저 앉아있었다. 그런데 우중충한 얼굴로 앉아있는 내 반대편의 남편은 이상하게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식당이 유명하지 않아도 맥주는 분명 어디에나 있고, 오히려 한적하니 여유로워서 좋다며 말이다. 폭풍우 속에선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법이다. 남편의 태평한 얼굴은 화를 돋구었다. 화장실로 향했다가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자리로 돌아오는 찰나 수상한 장면을 마주쳤다. 남편은 담배 한개피를 입에 물고 있었고, 그런 남편을 건너편 노숙자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연애 6년에 결혼생활이 3년, 나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남편은 노숙자 할아버지에게 담배를 빌렸을테고, 감사한 마음에 적선을 했을 것이다. 각설하고 그에게 바로 물었다.


“얼마 드렸어?”

“오 유로.”


입꼬리를 말아 올린 모습이 마치 ‘나도 돕고 남도 돕고, 일석이조 아냐?’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남편의 대답을 들으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 곁엔 그새 친구들이 생긴듯 했다. 주민으로 보이는 한 중년 남자가 노인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남자의 아이 둘은 강아지를 만지며 즐거워했다. 생경한 모습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노인은 생긋 웃어보였고,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스페인어로 인사를 건넸다.


“Hola!(안녕하세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짓으로 강아지를 쓰다듬어도 되냐고 물었고, 그는 고개는 끄덕였지만 입은 여전히 꾹 다문채였다. 나 또한 지금껏 Hola(안녕하세요)와 Gracias(감사합니다)만 앵무새처럼 말하고 다녔던터라 어색한 미소만 지을뿐이었다. 그러다 한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강아지를 가르키며 그 단어를 말하자 노인은 환하게 웃으며 스페인어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가 말하려던 바는 느낄 수 있었다. 웃으며 노인과 개와 그들의 친구들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니 남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언제부터 스페인어를 알았어?”

“내가 스페인어를 어디서 알았겠어. 근데 갑자기 한 단어가 생각났어.”

“뭐라고 한건데?”

“Chica? (여자아이에요?)”


남편 손을 잡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어쩐지 전보다 더 운치가 있어보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건물들은 대각선으로 그림자를 넘실넘실 그렸고 도시는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 폭풍우도 이미 가라앉은 뒤였고 남편은 늘 그렇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말라가에서 마지막 날이 밝았다. 눈을 뜨니 햇살이 테라스에 모락모락 김을 만들고 있었다. 밤새 비가 내린 모양이었다. 커피를 타서 밖으로 나가보니, 건너편 육교 아래에 한 남자의 분주한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보니 다리 아래엔 빨랫줄이 여러개 달려있었고 그 아래엔 허름한 텐트가 물 웅덩이에 반쯤 잠겨있었다. 그리고 그의 개는 주인의 다급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람빠진 축구공을 주둥이에 물고는 연신 세차게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개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멀리서봐도 놀아달라는 것이 분명했다.

남자를 도우려는 것인지 햇살이 유난히 뜨거운 날이었다. 조식을 먹고 다시 돌아오니 테라스 의자 위에 잠시 말려놓은 수영복이 바싹 말라있었고 남자의 텐트도 빨랫줄에 잘 매달린 채였다. 남자는 그새 한숨 돌린 모양인지 이번에는 맨발로 쪼그려 앉아 개에게 공을 던져주고 있었다. 남자가 공을 던지면 개는 번개같이 그곳으로 달려가 공을 물어오거나 좌우로 신나게 흔들어 대기를 반복했다. 남자는 웃고있었고 개도 웃을 수 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시선을 다리 아래에서 위로 옮기자, 꽃으로 머리를 한껏 치장한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사방에서 불규칙적으로 나타났지만 향하는 곳은 같았다. 영문을 알수는 없어도 도시 내에 경쾌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남편과 함께 밖으로 나가보았다. 꽃을 따라 구시가지를 향해 걸으니 시내 곳곳에 간이 가판대가 늘어서있었고 천막 아래에선 하나같이 싸구려 플라스틱 꽃장식이 달린 핀이나 목걸이 등을 팔고 있었다. 그제서야 전날 시내 곳곳에서 봤던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말라가에서 한해 중 가장 큰 축제가 열리는 중이었고, 그 마지막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내용이었다. 남편은 대뜸 나를 가판대로 이끌더니 주황색 장미 꽃이 양쪽에 크게 달린 머리핀을 집어들었다. 시내는 온통 축제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음악이 크게 울려퍼졌고, 음악이 있는 곳이면 모두들 분홍색 물방울 무늬가 그려진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모든 소동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분명 어제까지 잠들어 있던 도시가 깨어난 것 같기도 했고 혹은 도시의 꿈 속에 우리가 들어온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사방에서 군중은 무리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가뜩이나 낡은 도시의 길과 성벽이 부서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스페인어 노랫가락을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그들이 진심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무엇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오늘 처음보는, 그리고 다시는 보지 못할 이 사람들은 역동적으로, 진심을 담아 현재에 머물고 있는듯 보였다. 나는 종종 고향을 다시 찾아도, 새로운 타향을 선택했어도, 또는 여행을 떠나서도 진심으로 살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것에 메여서,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미래만을 쫓고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도시를 떠나기 전 한번쯤은 근심과 걱정 대신 머리에 꽃을 달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말라가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한 골목길, 2023, VivaJ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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