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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Feb 04. 2023

6. 낭만 없는 도시, 설렘 없는 사이

독일 여행의 마지막 도시 하이델베르크

유럽에 처음 온 한국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유럽 사람들도 여기 살다 보면 이 풍경에 지루해질까’하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까 싶다. 내가 독일에 처음 왔을 때처럼 말이다. 독일에 첫발을 디딘 지 9년이 지난 지금, 적어도 나의 경우엔 지겹진 않아도 대부분의 것들에 금세 익숙해졌음을 느낀다. 고즈넉한 독일식 옛 목조건물을 보면 ‘막상 살면 수리비용이 장난 아니겠지? 이런 건 함부로 수리도 못한다는데.’라는 생각이 들고 구시가지의 돌로 만들어진 거리를 보면 ‘야 이건 한번 잘못 넘어지면 최소 전치 4주다.’ 싶으니 말이다. 그러니 하이델베르크라고 다를 바가 있으랴 싶다. 물론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여느 도시와 비교해 봐도 단연코 아름다운 도시이다. 그래도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 도착할 때마다 ‘여기가 하이델베르크란 말이야?’라는 생각과 함께 실망감이 밀려오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역사를 벗어나면 보이는 풍경은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 마저 준다. 끝이 보이지 않게 주차된 자전거와 사방으로 펼쳐진 회색 도로가 낭만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면 처음 보는 풍경일 것이라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이곳엔 낭만보단 산업의 거친 발걸음이 지나간 곳이라는 인상을 준다. 더군다나 늦여름에 다시 찾은 하이델베르크는 연극이 끝난 무대처럼 구름이 커튼처럼 빼곡히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또다시 밤을 보낼 지붕을 찾아 우울한 중앙역을 벗어나 시내로 향했다.


이미 열 번 가까이 와 본 하이델베르크였기에 우리는 익숙하게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앙역에서 탄 트램은 중심가를 지나 하이델베르크 성 쪽으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삭막한 중앙역을 벗어나자 길게 뻗은 공원 맞은편에 슈퍼마켓이 하나 보였다. “저기 기억나? 치타 입양한 날 저기서 모래랑 사료 사 왔잖아.” 치타를 데려온 곳은 하이델베르크 근처에 살고 있는 한 브리더 가정이었다. 어린 고양이에게 긴 자동차여행이 낯설까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갔던 것이다. “맞아. 그때 치타 놀래서 침대 밖으로 안 나왔잖아.” 남편은 반갑게 대답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트램 밖의 풍경은 부지런히 바뀌고 있었고 트램은 한 교차로 앞에 신호를 받기 위해 멈추어 섰다.

“어! 저기 우리 처음 하이델베르크 왔을 때 묵었던 한인 민박인데?” 첫 하이델베르크 여행 때 우리는 그곳에 묵었다가 마침 방송사와 유럽여행기를 찍고 있던 어떤 한국 시인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우리 모습이 담긴 영상은 편집되어 본방송엔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었지만 하이델베르크에 오니 다시 떠오른 것이다.

트램은 관광지마다 한 움큼씩 관광객들을 내려놓았고 마지막 역에 도착할 때는 우리 둘 뿐이었다. 그동안 남편이 프러포즈를 했던 거리와 몇 년 전 찾았던 식당 등 수많은 기억이 담긴 장소들을 지나쳐왔지만, 모든 것을 말하기엔 트램은 너무 빨랐고 우리의 추억은 너무도 많았다. 이내 우리는 텅 빈 트램 안에서 각자 눈동자를 굴리며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을 쫓으며 조용히 창 밖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려야 할 역에 다다르자 남편이 말없이 윙크를 한다. 사랑의 눈짓이 아닌 이번 역에 내려야 한다는 신호이다. 익숙한 도시처럼 익숙한 동반자들의 수신호이다. 우리가 내린 곳은 하이델베르크 성 아래에 있는 한 정거장이었다. 트램 정류장 건너엔 광장이 있었는데 마침 장이 열려 치즈나 빵을 파는 천막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카페들이 늘어서 있었고 맞은편엔 우리가 묵을 숙소가 서있었다. 숙소 뒤편으론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가파른 절벽 위로 차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한인민박, 백팩커스, 에어비엔비, 모텔, 비즈니스호텔을 거쳐 이번에 예약한 하이델베르크 숙소는 오래된 부티크 호텔이었다. 작은 로비를 지나 방에 들어오니 내부에는 마치 유럽 시골 박물관에 있을 법한 가구들이 들어서 있었다. 오래된 유럽 호텔은 대부분 지하실을 연상시키는 쿰쿰한 냄새와 카펫이 깔려있음에도 삐그덕 거리는 바닥이 샴쌍둥이처럼 함께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잊게 하는 장점도 있다. 그것은 바로 대부분 천장이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지만 앉아서 쉴 수 있을 정도의 발코니도 마음에 쏙 들었다. 발코니로 나가보니 호텔 맞은편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이델베르크 뒷골목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길 건너 카페엔 단골들이 많은지 붐비지는 않아도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거리 끝에선 종종 유모차를 끌고 산책 나온 엄마들과 번듯하게 차려입고 어딘가로 발길을 서두르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숙녀들도 홀연히 나타났다 다시 사방으로 흩어지곤 했다.



매일매일 기차를 타고 다른 곳에서 잠을 잔 지 오일째였다. 오전 내내 피곤해하던 남편은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한 후엔 기운이 돌아온 듯 개운해 보였다. 허기가 진 우리는 시장에서 요깃거리를 사기 위해 지폐 몇 장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호텔 로비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에는 카펫이 깔려있었지만 계단을 디딜 때마다 삐걱 소리가 요란했다. 동굴같이 어두운 로비에는 한 사람이 앉으면 꽉 차는 리셉션과 벨벳 천으로 감싸인 작은 스툴이 놓여있었다. 밖으로 나가니 어두운 로비에 있다 나와서 인지 상대적으로 밝게 보였지만 날씨가 흐려서인지 도시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그래도 숙소 뒤편의 숲에서 불어오는 듯한 바람은 상쾌했다. 숨을 크게 들여 마시니 바람에서 낡았지만 잘 정돈된 지하실 같은 하이델베르크 특유의 냄새가 났다. 하지만 느긋하게 감상을 즐기는 나와 다르게 남편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미션 모드’가 켜진 것이다. 자신의 스마트 워치를 잠시 들여다보던 남편은 “십 분 후에 다시 여기서 만나.”라는 말을 남기고는,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빵을 팔고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나 또한 웃으며 짧게 손짓을 하고 바쁘게 다른 상점으로 향했다. 물론 남편은 나의 손짓을 보지 못했다. 내가 향한 곳은 광장 바로 앞의 세계 와인 전문점이었다. 금발에 앳된 점원이 내가 ‘포르토 와인’을 찾는 것을 ‘포르투갈 산 와인’을 찾는다고 착각하는 바람에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와인을 들고 밖으로 향하니 남편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광장을 가로질러 천막 쪽을 향해 걷다 보니 멀리서 남편이 웃으며 좌우로 장바구니를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장바구니엔 시장에서 산 치즈와 올리브 그리고 흰 밀가루로 만든 바게트가 담겨있었다. 시장은 테오도르 다리 근처에 있었는데, 다리 건너편을 보니 강가에 펼쳐진 잔디밭이 햇살에 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과 나는 서로를 슬쩍 바라보곤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지체하지 않고 다리를 건너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동안 수십 번 건너온 다리였지만 달라진 것도 있었다. 다리 앞의 원숭이 동상을 문지르는 사람이 적어졌다는 것이다. 코로나 전에는 이 황금빛 동상의 머리를 만지며 사진을 찍느라 줄이 늘어서 있기도 했다. 이 동상에 대해선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학생들의 고약함을 알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한 무리의 불량한 학생들을 처벌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사람도 있지만, 관광객들에겐 그저 만지면 행운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동상일 것이다. 동상 옆에는 테오도르 다리의 요란한 입구가 보인다. 테오도르 다리의 정식 명칭은 ‘칼 테오도르 다리(Karl-Theodor Brücke)’지만, 백 년 후 하이델베르크에 다른 새로운 다리가 지어지면서부턴  ‘오래된 다리(Alte Brücke)’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 오래된 다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다리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네카(Neckar) 강이 가르고 있는 도시 중앙을 다시 이어주는 이 다리는 이전에 8개의 다른 다리들이 지어졌다 사라졌던 것 곳에 다시 세워진 비교적 ‘새’ 다리이기 때문이다. 처음 다리가 세워진 것은 역시나 로마시대였다고 한다(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대부분의 도시에선 로마인의 흔적이 늘 유령처럼 따라다닌다.). 이 부지런한 로마인들은 이 천 년 전 네카어강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건설했지만 이곳에 정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관리가 잘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후 다리가 부서지고 머지않아 로마제국도 멸망하자, 천년 간  후손들 중엔 다시 다리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년 후 이 의지를 보인 곳은 쇼나우(Schönau) 수도원이었다. 13세기 이후 성이 세워지면서 성이 있는 지역은 팔츠 선제후에게, 강 건너 지역은 마인츠 선제후에게 속해있었기에 다리는 사실상 도시의 두 부분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성 안쪽과 성 밖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요란한 다리의 입구가 사실은 한 도시의 입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도시 사이에 이전에 부서진 다리가 여덟 개나 있었던 것은 ’유빙‘때문이었다. 강이 얼어 만들어진 얼음이 강을 따라 흐르면서 다리나 둑 등의 구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여덟 개의 다리가 대부분 나무로 지어졌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지금 서있는 다리는 인간이 만든 다리는 자연에 의해 파괴되고 또 인간은 다리를 짓고 하는 지난한 여정이 반복된 후 남게 된 것이다. 이 다리에겐 사실 테오도르 다리보단 ‘칠전팔기’란 이름이 더 어울릴 법하다.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별말 없이 빠르게 강을 건넜다. 중간중간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을 지나쳤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이미 수도 없이 봐와서도 하지만, 구름이 몰려오기 전 잔디밭에서 햇빛을 쬐기 위해서였다. 강을 건너 이십여 분간 걸으니 금세 다른 다리가 나타났다. 우리는 계단으로 내려가 잔디밭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앉을 곳을 찾기 위해서 다시 이십여 분간 헤매야 했다. 볕이 좋은 곳이면 사방에 거위 똥 때문에 발 디딜 곳이 없었고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곳은 이미 아이들 데리고 피크닉 나온 가족들이나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학생들이 차지한 후였다. 남편과 나는 아쉬운 대로 반쯤 그늘에 가려진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강가에서 찬바람이 불어왔지만, 바람이 불어오면 그늘이 움직여 햇빛이 더 비추어 나름 괜찮았다. 강을 사이에 두고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 쪽을 바라보며 와인까지 마시니, 다리를 건너 걸어온 보람도 있었다. 시장에서 사 온 치즈와 올리브에 갓 구운 빵을 곁들여 먹는 것도 훌륭했다. 하지만 여유는 얼마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한 거위가 강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대학생들의 피자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막상 피자를 훔친 거위는 조용히 달아났는데 뒤로 수십 마리의 거위들이 흥분하여 쫓기 시작하면서 소란이 났다. 한 놈이 피자를 들고뛰면 뒤이어 세네 마리가 한꺼번에 몰려와 피자를 뺏고 그 사이에 떨어진 조각을 다른 놈이 들고 달아나는 모습은 정말 치열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그 현장을 목격한 우리는 동시에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한바탕 웃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와인치곤 도수가 높은 포르토 와인 한 병이 금세 바닥이 났다. 그리고 그 사이 거위들의 피자소동도 끝이 났는지 주변은 다시 평화로움을 되찾았다. 다만 거위 하나가 피자가 물에 빠진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도 천천히 자리를 털고 지도를 볼 필요도 없는 익숙한 도시에서 빈 와인병 하나만을 손에 덜렁 들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물론 이번에는 술 대신 추억을 한가득 담아서 말이다. 우리가 하이델베르크를 또다시 찾게 되면, 그건 낭만이 아니라 추억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찬 곳을 방문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어디에 공공 화장실이 또 어디에 지름길이 있는지 속속들이 아는 도시를 방문하는 것도 좋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계가 설렘이 아닌 안정감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여행도 또 그런 관계도, 나름대로 괜찮다.


 

하이델베르크, 2022 VivaJ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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