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 kaya Lee Mar 21. 2016

눈 덮인 마을에서... 밤이 깊으면 밀크티를 끓여



잘 지내나요? 오랜만입니다.

저는 지금...... 잘 지내고 있어요. 긴 시간 소식 전하지 못하였지요...

저는 지금 눈의 나라, 고요한 도시, 아니죠, 이곳은 도시가 아닙니다.

아주 작디작은, 구석배기 어느 마을에 와 있어요. 이곳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잘 지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영화 Love letter에서 여주인공이,

하얀 설원에서 막막히 이 외침을 부르짖던 게 그렇게도 생각이 납니다.

그래요, 바로, 제가 지금 있는 이곳도 그만큼이나 새하얗고 차가운,

눈 내리는 마을 겨울 왕국입니다. 어느 결에 전,

이곳까지 와버렸네요.






























TV도, 컴퓨터도, 인기척도 없는 외진 곳이지만,

방 안에는 덩그러니 기타도 놓여 있고,

이전 머물던 사람이 읽다가 두고 간 듯한

책 몇 권과 스케치 노트들,

평범해 보이지만 놀라우리만치 정갈하고

완벽하게 구비된

작고 써늘한 부엌이 딸린, 아담한 곳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여의치 않게,

묵언수행 중입니다.

어디 즈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를

몇몇 마을 사람들만 그저 오후 나절 간간이,

마을에 오직 하나뿐인 작은- 아주 작은-

잡화점 근처에 가서야 간신히 눈에 들어옵니다.









밤이면.......... 사위가 너무나 고요해져서, 저는 때때로 침대 곁 창밖을 바라봅니다.

깜깜해서 주위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가만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멀리,

다른 집의 불빛이라든가 옅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아주 멀찍이서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조금 안온한 기분이 됩니다.......... 적어도 이 수족관 같은 어둠 속에

나 혼자만 눈뜨고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이곳의 숲에서는 바다소리가 납니다. 파도 같은 바람소리가요.

큰 곰이라도 한 마리 내려올 것 같은 집 뒤의 작은 산은,

해가 뜰 무렵이면 새들 지저귀는 소리로 정다웁지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세상 끝 언저리에 나 혼자만 살아남은 것 같은 그 적막감, 우물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은

그 망연하고 헛헛한 심정을 상상할 수 있으시겠어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먹물 같은 고요함이 웅크려 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이토록이나 깊은 밤중에,

저는 어떤 상념들과 마주하려고 이렇게나 잠 못 이루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잠자코 깨어 있다가 잠이 영 오지 않으면,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열어

차를 한 잔 가만히 끓여냅니다.

아이들 장난감 같은 모카포트 하나를

찬장에서 발견한 이후로, 저는 그 귀여운 도구로

커피를 끓여먹는 재미에 아주 빠져버렸습니다.

날씨가 좀 더 쌀쌀해지는 날이면,

몸을 덥혀주는 진한 얼그레이 밀크티를 마시거나요.

저는 어쩌면, 커피를 내리고 난 뒤

부엌을 감도는 그 나지막한 온도와

은은하게 부엌 안을 떠도는 얼그레이의 여운,

원두 향 등이 너무 감미로워서

늘 습관처럼 차를 끓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부엌 안 희미한 향내들이 공기 속을 부유하는 게

때때로 너무 좋아서, 저는 도리어 그 욕심에

밀크티를 매일 밤 부지런히 끓여댑니다.











어제는 제법 멀리까지 산책을 나갔습니다.

무성한 자작나무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붉은색 집들이, 제법 줄지어 자리해 있었어요.

창가에 놓인 빛바랜 달라허스트며 마트료시카,

말라붙은 티백이 담겨 있는 찻잔 등

사람 살던 모양새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못내 정겨웠습니다.

하지만 그 긴 길을 내내 걸어가는 동안에도...

마주오는 사람 한 명 없었습니다.

햇살은 따사로운데, 급작스럽게 외로웠어요.














그래도 조금 더 걸어나가면, 마을 전체의 생계를 도맡고 있는 작은 가게와,

마을에 단 두 군데밖에 없는, 작은 앤티크 카페가 있습니다. 누가 그러는데,

이곳에서 구워내는 시나몬 롤이 이 근교에서 가장 알아주는 맛이라고 하더군요. 

가게는 작지만, 고풍스러운 바다색 앤틱 의자와 점심식사 즈음 풍기는 진한 수프 냄새가

카페 안을 자욱하게 채우고 있어 

다른 이들의 온기와 겨울날의 다사로움을 물씬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곳입니다. 



























































































































TV와 타인이 공존하지 않는 삶은

눈물이 날 만큼이나 단조롭고,

지나치게 평화롭습니다.

내가 그동안 이 많은 시간을 내내 어디에 써왔던가, 자문하고 궁금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요.


새벽녘에 나도 모르게 눈이 떠져

창밖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으면, 

두려운 것은 사람도 곰도 고독도 아니라,

정작 내 속에 든 미련과 후회,

가늠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한 기대와 불신이라는 걸

불쑥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 혼곤히

곯아떨어지는 날들의 반복이지요.









부재란 때론 참 좋은 것입니다.

평소에는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해서

마땅히 고마움을 표하지 않았던 것들에게,

또 그래왔던 이들에게,  


당황스럽지만 어느 순간 금세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과, 내가 누려온 것들의 존재감, 우선순위 따위를 사무치도록

몸으로 마음으로 학습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사소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사소하지 않은 것인지를

거리낌 없이 자문하게 되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빨랫감도, 밥그릇도, 달걀 프라이도,  

일 인분의 모양새는 공허하지만

고요하고 정갈한 부엌에서 저는 어느 순간

심해어 한 마리가 됩니다. 그래요,

이 시간과 생각의 타래들은

여지껏 가지기 힘들었던   

묵상의 모양새를 하고 있네요.


저는 언젠가, 아주 나중에,

서글픔마저 솟아오르며 이 시간들을 반추하겠죠.

책을 읽고, 숲길을 따라 산책을 하고,

'읍내'에 나가 편지를 부치고,

모카포트 속 커피가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는 

찰나의 시간, 창밖의 해 그림자를 좇는 일이

이렇게나 생경하고 안락한 사치가 되어버린 건

도대체 언제쯤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럽게 내 몸에 스며들어

도리어 이젠 그것을 벗어날 생각에

달팽이 더듬이처럼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해가 조금 나는가 했더니,

어느 결엔가 또 눈이.......

흩날렸습니다.




































제가 지금, 이 순간에,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 아세요?

시장입니다. 마켓 말고, 시장요. 

어느 나라이건, 어느 도시이건 지금 같아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만 같아요.


사람들의 왁자지껄함 속에

'나도' 존재하는 곳.

다른 사람들과 시선이

맞부딪히는 곳.

나도 모르게, 바빠지는 곳.

번잡스럽고, 조금 성가셔도

그곳에서라면 적어도 혼자

사무치는 일 같은 건

죽어도 없을 


그곳으로 향하고 싶습니다.

스쳐왔던 그 많은 곳들 중

단 하나라도요.








































































여름이 다가올 무렵 유럽 어느 곳에서나

흔하게 열리는 마을 시장들은 정말이지

보기가 좋습니다.

화사하고, 푸릇한 것들이 그득해서 그 해사함에

눈이 너무 부시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의 미소와

이유라고는 없는 밝음. 여유와, 

여기저기서 서성대는 배려와 온정.


그리고 넘쳐흐르는 

비할 데 없는 생명의 열기.

그런 것들요.


그 여름날을 기다리며....................

이렇게 봄날을

흘려내렵니다.

































연어 속살처럼 불그레한 생기와,



















반짝임에 녹아들 것 같은 베리들의

아린 달콤함을 기억하며,

눈의 나라 사람들은 그 긴 겨울을,

추위와 절절함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거겠죠?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저는 이미 컴퓨터 앞 자판보다, 밤늦게 노란 조명등 아래서 손으로 적어내려가는

연필의 자작한 가칠함에 더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문명의 이기를 거스르는 행위들을

홀로 즐기고 있습니다. 나중에 저를 만나게 되거든, 당신도 잠 안 오는 어느 밤엔가

손으로 거칠게 흘려 쓴, 당신만의 뜬금없는 싯귀들을 보여주세요.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는, 너의 말을 듣고, 생각하고, 떠올렸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귀하고 배려심 넘치는 친절한 답신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럼, 이만. 마음을 담아.






작가의 이전글 교토 책방, 세상 책들의 지구 마지막 날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