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읽다가 대구리를 한 대 맞았다. ‘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불교에선 '카르마', '업'등 인간사의 여러 순환의 고리를 가리키는 말들이 있다. 타로에서도 '운명의 수레바퀴' 카드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하여 인간의 조건, 환경의 얽힘에 따른 유有 조건적인 상황을 묘사하는용어들과 글들이 많다.
난 그동안 이를 단박에 끊어내는 것인 줄 알았다. 예를 들어 무한 루프의 고통, 순환의 고리를 나의 어떤 행위로부터 물리적으로 ‘없애거나’, ‘끊거나’라는행위를 통해 사라지거나 변화하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알았다. 그것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굴러가고 있을 것이며 단지 굴러가는 그 펼쳐짐 속에서 내가 어떻게 ‘볼것인가’가 중요한 것임을. 그게 역으로 끊는 것임을.
그것을 어떻게 볼 것 인가?'본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게 될 때는 거리를 둘 수 있다는 말이고 그럴 때 선택과 의지는 운명의 주인인 자신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교수님이 늘 하셨던 말씀처럼 역행하는 삶의 시작이라는 것이고 이로부터 카르마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난 족쇄를 끊는 것에 집중했다. 쉽게 속는다. 나의 힘을 키우고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변화는 시선에 대한 변화를 가리키고 있다. 단지 바라보고그것을 ‘앎', 그럼으로부터 '환경에 대해' 풀려나는 것이 방법이지 내 힘이 물리적인 환경을 변화시킬 순 없다. 한낱 개인이 어떻게 우주를 거스르지.
카르마, 순환의 고리 그것은 평생, 무한 지어서 돌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무한의 무한이다. 단지 이를 아냐 모르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이는 같은 말로 그냥 이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라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장자에서는 그것에 대해 순리라고 명한다. 일단 받아들이고 그것을 '보라', 볼 때 오히려 매달림에서 풀려나는 역설을. 우주에 순응할 때 우주를 역행하는 이 비밀을! 우주를 거스르는 게 아니라 우주를 타는 것이었다!!너무 진기하다!
끊으려는 의도적인 행위에 대한 같은 말은크리슈티나 무르티가 말한 것처럼 부정은 곧 그것에 대한 있음을 가리킬 때. 끊음의 행위=끊으려는 것이 있음=카르마에 대한 영원한 구속과도 같은 말이었다. 이마저도 인위적인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냥 그런 삶을 받아들이고 보면 된다. 사실 이 대구리로서는 죽음인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대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선물을 준다는 것을! 손댈 것은 없고 내 대구리가 수용하고 보기만 하면 된다.그럼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가신단다! 여기서부턴 또다시 믿음의 영역. 매우 진기하도다, 이 삶이여!아 나만 놀랍나! 신나!
‘무릇 우리가 삶을 얻은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우리가 삶을 잃는 것도 순리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르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이것이 옛날부터 말하는 '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縣解)'이라 하는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오램을 이기지 못하는 법. 내 어찌 이를 싫어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