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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May 24. 2020

사랑과 연대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한나 야나기하라의 [리틀 라이프]를 읽고

한밤중에 티켓 상자를 열어젖히고야 말았다. 상자에는 연극, 뮤지컬, 클래식 등 공연 티켓부터 타국의 버스카드와 박물관 입장권과 같은 여행의 흔적들까지 가득 담겨있었다. 한 장 한 장 티켓을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것들이야말로 추억의 흔적이요 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티켓 다음에 놓인 어느 퀴어 전문 서점의 명함을 발견했다. 곧이어 그곳에서 산 한 권의 책을 떠올렸다.


제목은 『리틀 라이프』. 나는 이 책의 영어 원서, 한국어 번역본, 프랑스어 번역본 이렇게 세 종류를 소장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나만의 보물 같은 책. 바로 한야 야나기하라의 『리틀 라이프』다.


뉴욕을 배경으로 윌럼, 멜컴, 제이비, 주드 네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처음에는 네 인물 모두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 주인공 주드 한 명의 이야기를 중심축 삼아 가파르게 진행된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로 자라난 주드는 오랜 친구들에게조차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 과거의 고통은 주드를 집어삼키며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벌하는 무간지옥에 가두게 만든 원인이다. 세 친구와의 우정이, 연인의 사랑이, 직업적 안정이, 혹은 그 무엇이라도 주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저자는 소설의 끝까지 그 물음을 밀어붙인다.


그는 노력했다. 평생 동안 노력했다. 다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고, 깨끗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결정을 내리고 나자 놀랄 정도로 희망이 솟구쳤다. 그냥 끝내버리기만 하면 그 오랫동안의 슬픔에서 자기를 구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자신이 스스로의 구원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어떤 법도 그에게 계속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여전히 자기 것이었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어떻게 이걸 깨닫지 못했을까? (572쪽)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소설이지만 나는 매번 2권의 중반부에 다다르면 놀이기구의 아주 높은 곳에서 순식간에 떨어질 때와 같은 상태가 된다. 쿵쿵대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고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고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아주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나는 사랑과 연대의 힘에 대해서 생각했다. 주드가 역경을 딛고 생존의 단계로 도약할 때마다 그의 곁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리틀 라이프』 속 주축이 되는 다른 세 명의 친구와의 우정이 있었다. 주드는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의 모습까지 받아주고 곁에 있어 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은 어느 때라도 도움이 된다. 비록 그 자신은 깨닫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대학에 갔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친구가 되어주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만났어. 그 친구들이 내게 가르쳐줬어. 정말이지 모든 것을. 그 친구들이 나를 만들었고, 진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
지금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내가 보기에, 우정의 오랜 요령은 너보다 더 나은 사람들 ―더 똑똑하다거나 멋진 사람들이 아니라 더 친절하고 더 아량 있고 더 관대한 사람들 ―을 찾는 거야. 그리고 그 친구들이 네게 가르쳐주는 것들에 감사하고, 친구들이 너에 대해 말해주는 것들, 아무리 나쁜 ―혹은 좋은 ―말이라도 경청하려고 하고, 그들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거지. 그게 제일 힘든 일이야.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이기도 해.” (311-312쪽)


그러나 정작 소설을 덮으며 내가 깨달은 것은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드는 주드 자신만이 구원할 수 있다. 이 소설 속 결말에 대하여 그것이 구원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의견이 갈릴 테지만, 나는 그 또한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주드는 스스로와 화해하기 위해,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해 평생 노력해온 인물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장 애착을 느끼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리틀 라이프』는 네 남자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 한 사람의 지난한 생에 대한 이야기,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 비통하지만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우리 자신의 이야기. 『리틀 라이프』의 세계로 초대하는 티켓을 바로 지금 당신께 드린다. 부디 받아주시기를.




“주드에게.” 해럴드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필요 없긴 해도) 아름다운 편지 고맙게 받았다. 그 편지에 쓰인 모든 말들 다 고맙다. 네 말이 맞아. 그 머그는 내겐 정말 소중한 거야. 하지만 너는 더 소중해. 그러니 더 이상 자기를 고문하지 마라.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면, 이 모든 사고가 인생 일반에 대한 은유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어떤 게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주지. 때로는 아주 근사한 방식으로 말이야.

사실, 어쩌면 나도 결국 그런 종류의 사람인지 몰라.

사랑을 담아, 해럴드.” (199쪽)


*반디앤루니스 펜벗 10기 활동 중 작성한 원고입니다. 

원문: http://blog.bandinlunis.com/bandi_blog/blog/blogMain.do?iframe=viewPost.do&artNo=46088339



글 . 비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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