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그리는 귀여운 할머니 되기 프로젝트 시작하다.
오늘도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자리를 잡는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종이의 테두리에 마스킹 테이프를 붙인다. 그리고, 오늘 그리게 될 사진을 자세히 살펴본다. 어떤 것을 중심으로 잡을 것인가? 어떤 부분을 그리지 않을 것인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색연필을 들고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다. 이런 시작으로 나는 요즈음 오일파스텔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학창 시절 미술시간은 정말 싫었다. 키도 작고 못생긴(미웠기 때문에 이렇게 기억되는 지도 모르겠다.) 남자 미술선생님은 독설로 유명했다. 4절 도화지를 턱밑에 들고 우리는 선생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면 그는 얼굴 한번 그림 한 번을 번갈아 보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굉장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입을 열어서, ‘그림을 발로 그렸니?’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워딩이다. 한 번도 긍정적인 답을 들은 적이 없는 미술수업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소질이 없나 보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 안 되는 사람인가. 이런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어른이 되고서도 이렇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그 미술시간은 ‘나는 똥손이고, 나는 소질이 없고 나는 그리그리는 사람으로 살 수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해 주었다.
그런, 나에게는 아주 소박한 꿈이 있다. ‘그림 그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이가 들어서 이젤을 세우고 적당한 아티스트 앞치마를 입은, 작고 귀여운 할머니가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린다. 작은 화실 안에는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고,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그녀는 가끔 전시회를 위해서 외국을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방안에 있을 때 가장 평온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머 대강 이런 모습으로 늙어가는 근사한 노후를 그려보기도 했다.
가슴속에 숨겨놓은 욕망이 조금씩 눈을 떴다. 그래서 나는 요즈음은 그림을 그린다. 재미있게 신나게 엉망진창으로.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그리는 A5는 보통 우리가 만나는 A4용지의 반이다. 작가들이 그리고 전시를 하는 커다란 그림이 아니다. 거기에 테두리 보호를 위한 마스킹 테이프까지 붙이고 나면 아주 작아진다. 그런데 막상 그림을 그리려고 보면 너무 크게 느껴진다.
‘나는 여기를 어떻게 채울 수 있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스케치 작업을 한다. 스케치를 마치고, 색을 더하기 위해서 오일파스텔 하나를 들고 보면 더더더 크게 생각이 된다. 시작을 어디에 해야 하는가? 진한색부터 칠해야 하나, 연한 색부터 시작해야 하나? 배경부터 시작해야 하나? 디테일한 것에 약간의 색연필 작업을 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이 시작 전부터 많아진다.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하얀 종이 위에 어떤 색을 넣는다.
오일파스텔을 처음 시작한 몇 달 전에는 정말 과감했다.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 안에 한 장을 가득 채우고 픽서까지 뿌린다. 그리고 인증 사진을 찍는 것까지 다 하려고 애를 썼다. 이유는 완성품을 내어야 재미를 느끼고, 계속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가서 다시 이 모든 재료를 펼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 이유로 그때의 나는 무척 과감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완성하는 기쁨이 그 모든 것에 앞서는 그런 때였다.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선생님이 먼저 오일파스텔로 그린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은 차이가 난다. 나도 모르게 그려진 그림을 보면 비슷하게 그리려는 본능이 일어난다. 물론 이런 부분에서도 배울 점은 있다. 나 같은 초보는 선생님의 터치감이나, 방향, 강도등을 보면서 배우게 된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면 그 사진과 똑같이 그릴 수 없다. 절대로 그렇게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진 속에서 남겨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정해야 한다.
얼마 전에 그린 그림도 그랬다. 사진 속에는 버스 정류장도, 가판대도, 사람들도, 간판도, 이런저런 거리의 작은 것들이 보였다. 사진 속의 자동차는 더더욱이 그렇다. 특히 백미러나 번호판을 잘 그려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 한다. 하지만 크기가 작은 차에 그런 것까지 그릴 수는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포기하는 부분이 생긴다. 사진을 보고 그리지만, 내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편집하는 과정이 일어난다.
나는 이 그림에서 힘을 줄 부분이 어디인가?
벚꽃나무를 잘 그려보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다. 나무를 잘 그리면 그림 실력이 많이 향상된다고 한다. 봄의 벚꽃나무, 여름의 풍성한 나무, 가을의 단풍나무, 겨울의 눈 내린 나무를 표현하고 나면 웬만한 것은 다 그릴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을 믿어보자.
사진 속의 작은 벚꽃나무를 이렇게 자세하게 본 적이 있나. 싶다. 어떤 모양으로 자라고 있나. 어디가 가장 밝은가. 어두운 부분은 어디인가? 어떻게 해야 저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와서 예쁜 꽃나무를 만들 수 있을까? 평소라면 그저 휘리릭 보았을 그림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열심히 오랫동안 나무를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카페 창가에 앉거나, 신호등 바뀌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 횡단보도에 서있을 때, 눈에 들어오는 나무를 자세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나뭇가지의 진행방향과 굵기, 모양을 자세히 살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동안 화가들은 같은 사물을 나와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벚꽃나무를 완성하고 선생님에게 보여주면서 나는 물었다.
“선생님이라면 어디를 더할 건가요?”
“지금도 좋지만, 조금 더 과감하게 음영을 줄 것 같아요.”
“그렇죠? 이 나무의 이 부분이 조금 더 도드라지게 하고 싶은데, 제가 쓰는 색으로는 이게 최선이라서..”
“꼭 벚꽃나무라고 해서 핑크 계열만 쓰지 말고 좀 더 진한 브라운 같은 걸로 확 음영을 주면 어떨까요?”
“아… 망칠까 봐, 너무 조심했나요? ㅎㅎ”
솔직히 망치면 어떠한가? 이제 그림을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정말 쌩초보이고 똥손인데…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내 그림을 보니, 너무 조심조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의 살살 달래는 그림이다. 배움이 필요한 나는 조금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그림에 강한 색을 쓰는 것은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정말 가슴이 콩콩 뛰면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수없이 한다. 지금이라도 멈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정말 엉망진창이 되어 후회하지 않을까?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니다. 나는 한걸음 나아가야 한다. 아주 진한 브라운을 손에 들고 핑크색이 가득한 곳에 음영을 넣었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다. 한 곳을 그렇게 했으니, 밸런스를 위해서 전체 그림을 모두 진하게 올려야 한다. 전혀 생각하지 않던 색으로 도로의 그림자를 넣어보았다. 나 괜찮은 거지?
물론 강한 색을 쓰기 전의 그림도 나름 나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한발 나아가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그래서 완성한 그림은 썩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하고 행동을 한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이제 한 계단 위로 올라온 느낌이다. 앞으로는 이런 그림을 그릴 때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아니 아주 많다. 결국엔 모든 것을 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나에게 필요한 일을 알 수 있다. 그저 미리 생각만 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나는 지금껏 미리 걱정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부터는 그리하고 싶지 않다. 물론 편안한 나의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일은 매번 용기가 필요하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해보고 싶다. 해보고 아니면 안 하고 다른 방법으로 다른 일을 하면 된다.
거실 한쪽에 놓여있는 그림 도구들을 슬쩍 보았다. 어서 앉아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아직 그럴싸한 화실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식탁을 이용해야 하지만, 나는 좋다. 항상 눈으로만 보던 그림 재료들을 구입할 때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떤 것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몇 달 만에. 생각만 바뀌면 이렇게 되는 일을 그동안 왜 못했을까?
완벽하게 똑같이 그릴 필요가 없다. (사진을 찍으면 된다.)
그림은 잘하고 못하고 가 없다. 오히려 자기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그리고, 어떤 화가님이 ‘나같은 사람은 너무 오래 그렸고, 많이 배워서, 당신이 지금 그리고 있는 그런 그림을 절대로 그릴 수가 없다. 처음 시작할 때의 그 느낌을 그리고 싶지만, 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을 즐겨라.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순간을 소중히 생각해라. 하지만, 한 가지 꼭 끝까지 그려야 한다. 망쳤다고 다시 그리지 말고, 시작한 캔버스는 꼭 어떻게든 끝까지 그려라. 그것만 하면 된다.’ 너무 감동받았고, 감사한 말이다.
나는 오늘도 그리고 싶은 것을 찾고 있다. 집에 가면 찬란한 여름 나무를 그려보아야겠다. 어쩌다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지만, 신나고 즐겁다. 굉장하다. 멋지고 근사하다. 이렇게 좋은 기분이 드는 일을 나는 계속할 것이다. 머리가 백발이 된 귀여운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상상만으로도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