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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길의 여유 Oct 03. 2023

오늘도 정리 중


 ‘정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지 최근에야 알았다.
 “내일 뭐 할 거야? ”
 “어, 정리.....”
 “또 정리, 정리 좀 안 하면 안 되냐?”
 “정리가 아니라 파일링해야 해.”
 
 맙소사, 정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다르게 표현하는 나를 보며 어이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집에서는 옷, 서랍, 그릇, 창고, 베란다 등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정리한다. 사무실에서 서가, 책상, 문서, 영수증 등을 쌓인다고 생각될 때마다 한다. 또 생각, 감정, 관계 정리도 수시로 한다. 무질서가 눈에 들어오고 심적으로 불편해지면 정리에 대한 압박이 시작된다.
 
 컴퓨터 바탕화면도 정리 대상이다. 급한 성격대로 모든 문서를 바탕화면에 저장한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바탕화면 가득 찬 파일을 각자의 특성에 따라 C드라이브에 폴더를 만들어 정리한다.
 
 사실은 그때그때 정리하는 부지런한 습관이 없다. 강의나 프로젝트가 끝나면 준비에 필요했던 자료와 프로젝트 결과물이 책상 위에 가득하다. 그러면 정리가 시작된다. 나의 피와 땀의 산물들을 다시 살펴보고 얽힌 복잡 미묘한 감정들도 함께 정리하여 폴더와 쓰레기통으로 분리한다.
 
 K는 너무 깔끔 떤다고, 적당히 하라 한다. 중1 때부터 단짝인 K의 방과 부엌은 무질서 그 자체다. 나는 그녀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정리해 주곤 한다. 한바탕 구조조정을 하고 나면 감탄하며 "자주 와라~" 한다. 친구 기준으로 보면 깔끔 떠는 것 맞다. B는 한번 할 때 제대로 하지 않아서 자주 하는 것이라고 정곡을 찌른다. 은근히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런데 자주 하는 것이 잘 못 된 건가?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살아야 한다. 섬세하지 못하니 자주 하는 것이 내게는 맞다. H는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너무 심해 ‘라 한다. 특히 파일 정리에 대해 부러움을 표한다. 파일 정리는 사무직에 오랫동안 있었기에 몸에 밴 습관 덕분이다.
 
 그래서 ’ 정리‘라는 낱말 대신 의도적으로 같은 뜻이나 다른 낱말을 사용하기로 했다. *오가나이징 (organizing), 클린업 (clean up), 어렌징 (arranging), 파일링(filing) 등이다.
 
 내가 ’ 정리‘에 신경 쓰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 집은 어린 시절부터 다른 집과는 사뭇 달랐다. 집안의 모든 공간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식구들이 입는 의복도 역시 깔끔했다. 엄마의 다림질은 세탁소의 전문가라 할 정도였다. 지금도 엄마는 내 집에 오시면 집안 정리부터 내 모양치레까지 잔소리를 한다.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요 정도 정리하고 사는 것은 엄마로부터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한 생존 전략의 산물이다.
 
 공간은 공간 주인의 심리상태라는 말이 있다.
 
 집은 온전한 휴식과 재충전의 공간으로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이다. 일터는 집중도를 높이고 효율성을 갖기 위한 일 하기 좋은 환경이어야 한다. 그래서 잘 정리된 공간이 필요하다.
 
 복잡한 생각과 감정은 그때그때 메모하고 간단하게 일기처럼 쓴다. 메모가 많아지고 어느 정도 방향성이 보이면 지인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내 능력에 맞춰 정리한다.
 
 정리 중 가장 힘든 것은 관계 정리다. 달이 차면 이지러지듯 관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감에 따라 무르익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관계도 있다. 내 의도와는 달리 나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도 생기고 나도 상처받는 경우도 있다. 관계는 교류의 시간 길이, 깊이와는 관련이 없다. 오랜 시간을 생각해야 하고 타이밍을 잡기도 어렵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 다. 내 삶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관계들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옥죄고 속박하는 관계를 불편함을 감내하며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 특별히 잘 못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책이 반복되는 관계, 뚜렷한 이유 없이 불편한 감정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관계는 정리해야 할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생각한다.
 
 바람직한 관계는 자연의 이치와 같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해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정리한다는 것은 자신과 마주하고 진짜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단순히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집착 또한 함께 정리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다시, 새롭게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서 인생을 정리하고자 한다. 최선을 다했나, 재미있었나, 보람되었나, 그만한 가치가 있었나, 내 옆에 누가 있었나, 그래서 행복했었는지 글을 통해서 정리하려고 한다.
 
 오늘도 이런 생각들로 정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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