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참 빠르다. 벌써 36번째 구정 맞이 시댁행이니 말이다.
결혼 초 3년 동안 지금은 없어진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티켓을 끊고도 한참 줄을 서서 기다려야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왜 그때는 그리 오래 걸렸던지. 작은 차를 장만하고서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줄을 서야 했던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만고만한 어린것들이 있던 인천의 시동생 식구들이 명절 때면 한 차에 같이 가려고 꼭두새벽부터 합류했다. 작은 차에 8명이 올망졸망 끼여 앉아 9시간이나 걸리는 오랜 귀성길을 함께 하곤 했던 시절이다. 길은 막히고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쉬 마렵다고 아우성을 치는 통에 어른들은 진땀깨나 흘렸다. 지금은 아무리 막혀도 여러 방향으로 가는 길이 생겨서 쉽고 빠르게 간다. 자칭, 타칭 베스트 드라이버인 남편이 운전하면 1시간 안에 도착하는 시댁은 경기도 안성에 있다.
안성 시내에서도 약 10분가량 더 들어가면 서운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고즈넉한 곳에 시댁이 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쭉 올라가면 반듯하고 정갈한 파란색 기와집이 보인다. 시부께서는 늘 ‘우리 집은 청와대 야’라 농담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긴긴 시간 끝에 도착한 시댁의 이곳저곳엔 산더미만큼 쌓여있는 일감들이 진작부터 진을 치고 어설픈 일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하에 3남 2녀를 둔 시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어머니다. 명절을 보내고 올라가는 자식들 손이 모자랄 정도로 싸서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다. 그분의 야망에 맞춰 준비된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완성하느라 명절 이틀 전부터 며느리들의 허리는 기댈 곳 없이 휘어져 갔다. 특히 넓은 거실을 그득 차지한 만두와 부꾸미 재료는 며느리들의 극한 명절 노동의 대표 선수들이다. 한입으로는 들어가지 않는 크기의 왕만두 재료와 식구들이 거의 먹지 않는 부꾸미 재료의 양은 보는 순간부터 입이 다물어지지 않곤 했다. 적당한 양으로 하시라는 핀잔을 매년 들으면서도 시오마니는 절대 양을 줄이지 않는다. 구정 때는 만두피를 미느라, 빚느라, 찌느라 거의 하루종일 중노동에 쉴틈이 없다. 추석에는 송편을 똑같이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마치 공장의 생산라인처럼 분업하여 다 같이 만든다. 어린이들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대량 생산라인 일부분을 차지하고 앉아 노동력을 제공한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모두 만두와 송편을 잘 만든다.
제일 하기 힘든 것은 부꾸미다. 만들기가 어찌나 힘든지. 생각만으로도 헉하는 소리가 나온다. 부꾸미는 손에 목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몇 겹으로 끼고 손으로 이리저리 뒤척이며 불에 익히는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음식이다. 만드는 제조상궁으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양을 이쁘게 만들기도, 적당하게 익히기도 쉽지 않아 난 할 때마다 투덜 거리곤 한다. 지금도 부꾸미는 먹기도 싫다. 뜨겁고 번거롭고 성가시다.
나는 공부를 썩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오직 책만 보는, 책벌레라 불릴 정도의 독서광이었다. 어쩌다 해 본 음식은 두부 부침 정도였다. 시댁에서의 명절 음식 준비는 내게 죽음의 비견할 정도의 고통의 시간이다. 명절 후 3~4일은 앓아누웠다. 왜 그리 명절은 자주 돌아오는지. 지금의 허리 디스크가 그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랬던 명절 풍경이 올해는 많이 달라졌다.
사뭇 세진 우리 며느리 입김과 약간 (?) 쇠약해지신 시어머니가 당신의 욕심(?)을 내려놓으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 많던 명절 음식을 나와 동서가 적절하게 양을 조절하여 간소하고 조촐하게 준비했다. 중노동을 해야 했던 만두 만들기는 구정 2주 전에 시누이들이 준비했기에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정말 착한 시누이들이다!
이번 명절 차례상의 아침 풍경은 예년과는 다르게 허전하고 쓸쓸했다. 거실 가득했던 아이들(전부 9명)이 직장 문제로, 출가로 오지 못하고 대표선수인 친손자 두 명만 왔다.
내년 명절의 아침에는 거실 가득 꼬물거리는 증손주. 증손녀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빚은 만두와 송편을 상에 올릴 상상 해 보니 괜찮은 그림이다 싶다.
시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가져가도 될 만큼 음식을 준비하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게다가 허리와 배에 두둑이 붙은 살 덕분에 앉아서 전을 부쳐도, 서서 장시간 음식을 만들어도 그리 힘들지 않게 된 것을 보니 자연스럽게 ‘안성댁’이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시어머님 뒤를 이어 큰 손으로 거듭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