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뭐 하시나?”
카톡에 뜬 문자를 보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들어보나 마나 일을 시키려고 수작 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에 말세가 몹시 험한 남편은 거의 톡을 보내지 않는다. 부탁이 있을 때만 보낸다. 그의 요청은 늘 시간이 오래 걸리고 번거롭고 복잡한 일들이기에 귀찮기 짝이 없다.
몇 분쯤 지나 통화해 보니 이번에도 역시 귀찮은 일이다. 시댁 인근 면사무소에서 교육받고 농지카드를 수령하는 일이다. 이리 저리 일정을 조정하여 안성행 시외버스를 탔다. 여전히 폭염으로 들끓고 있는 오후 3시. 시엄니 드릴 흑염소 즙 30개를 백팩에 넣고 양산 대신 밀짚모자로 태양을 가리며 출발했다. 한 시간 삼십 분 후 안성 중앙대 앞에 하차. 공무원 퇴근 전에 도착하기 위해 택시를 탔다.
시골 면사무소는 처음 방문이다. 동네 주민센터와 다를 바 없었다. 남편이 보낸 문자 속 공무원을 찾으니 친절히 맞아주었다. 직원의 안내대로 핸드폰으로 온라인 교육을 받았다. 시원한 물도 한잔 마시며 30분 만에 교육을 끝내고 카드를 받아 나왔다.
오랜만에 시골 버스 정거장에 섰다. 시골 버스 정거장은 한적해서 좋았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 갑자기 후드득,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뜨거운 대지를 당장 식혀야 할 의무라도 있는 양 맹렬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찬 비가 쏟아졌다.
면사무소에서 고작 3 정거장, 6~7분 남짓 거리에 시댁이 있다. 내가 탄 버스는 몇 정거장을 더 가서 유턴하여 다시 안성 시내로 가는 노선이다. 우산이 없던 나는 폭우 속을 뚫고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 기사 아저씨에게 반환점을 돌아내려 달라고 부탁하자 단호하게 “안 됩니다!” 한다. 난 기사에게 쫓겨난 듯한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내려야 했다. 참내. 시골 인심 한번 사납네. 하면서 그 장대비를 맞으며 길 건너 정거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곳에서 30분을 서 있었다.
요란한 빗소리를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산 위로 둘러싼 운무와 절묘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땅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도, 휘몰아치듯이 회전 모양으로 개울가를 향해 맹렬히 떨어지는 물줄기도 역시 볼만했다.
잠시 빗소리에 업되었다가 멈출 것 같지 않은 기세에 눌려 다운되었다가를 반복하다 비가 잦아들어 시댁을 향해 걸어갔다. 영락없는 촌부의 옷으로 갈아입고 우산을 쓰고 시엄니가 있을법한 밭을 향해 걸었다. 비를 맞으며 고추를 따고 계신 시모는 얼마나 시원한 비인데 무슨 우산이냐 하신다.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이 소나기에 흠뻑 젖은 대지의 향기로 위로받아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시댁으로 향했다.
한차례 퍼붓다 개이고 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 버린 소나기 덕분에 멋진 구름과 그 구름 사이로 예쁜 하늘이 보였다.
인생도 이렇게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