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쑥 뜯으러 가요
아침 일곱 시. 핸드폰이 드르르 떨린다. 알람인 줄 알았는데 폰 화면에 ‘아빠’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알람이 아니라 전화가 온 것이다. 이 시간에 아빠한테 전화를 받아 본 일이 없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아빠? 어. 아빠 무슨 일 있어? 엄마가 어젯밤에 구급차 타고 병원에 갔어.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 아니 무슨 말이야? 그저께만 하더라도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잖아? 밤에 갑자기 열이 너무 많이 나고 의식을 잃어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아빠도 울고 있었다.
엄마는 몸이 약하다. 지난 추석 연휴에도 엄마는 밥을 거의 드시지 못했다. 코로나에 두 번 걸린 이후 몸이 더 약해졌다. 약을 달고 산 지 어느새 십 년이 넘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견뎌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췌장 염증으로 인해 고열이 났고 염증 수치를 낮추기 위해 당분간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만약이라는 단어를 꺼내 최악의 경우를 이야기했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눈앞이 흐려졌다. MRI를 찍어야 하는데 엄마가 숨을 참지 못해서 몇 번을 실패했다고 했다. 기력이 없으니 더 이상 검사할 수 없는 상태라고. 다행히 염증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온 엄마는 2주 만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MRI는 찍지 못한 상태라 가족 모두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좀 더 잘 먹고 기력을 회복하면 다시 병원에 가야 한다. 불안이 현실이 되지 않기만을 매일매일 기도한다.
올해 엄마는 칠순이 되었다. 특별한 생일인 만큼 특별하게 보내려고 했던 계획은 모두 없던 일이 되었다. 엄마는 퇴원 후에도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 거의 누워만 지낸다고 했다. 아빠가 집안일부터 식사 준비까지 다 한다고 했다. 친정 근처에 사는 언니가 반찬을 냉장고에 가득 채워놓고 갔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엄마가 아프다고 해도 칠순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지난주 엄마를 보러 친정으로 내려갔다.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는 나아 보였지만 여전히 핏기가 없는 얼굴로 엄마는 우리를 반겼다. 입맛이 없어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에 또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고 잘 먹어야 낫는다고 나도 모르게 목청을 높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하는 살림이 그렇지. 언니와 형부가 며칠 전에 와서 주방 정리를 싹 하고 갔다고 하지만 냉장고는 손을 대지도 못했다고 했다. 냉장고 청소를 오늘은 꼭 하리라 마음을 먹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날짜가 지난 소스와 음료수 그리고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말라버린 고추장, 된장. 뭉그러진 채소. 버려야 할 것이 더 많은 냉장고였다. 냉장실을 비운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 같았다. 비우고 나니 냉장고가 썰렁했다. 한쪽을 끝냈으니 이제는 냉동고를 청소해야 한다. 여기는 더 가관이다. 언제부터 들어가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식재료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건 마른 멸치였다. 엄마는 음식을 잘한다. 멸치 육수를 내서 국을 끓이고 내장을 뺀 마른 멸치를 자주 밑반찬으로 만들었다. 조각낸 냉동 마늘도 두 봉지, 언제 냉동실에 들어왔는지 모를 송편, 찰떡, 그리고 쑥떡이 수북한 냉동고를 보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엄마한테 냉동고에 있는 떡을 다 버려도 되냐고 물었더니 쑥떡은 버리지 말라고 했다. 직접 뜯은 쑥으로 만든 거라며 나중에 먹을 거라는 이야기에 쑥떡을 다시 냉동고에 밀어 넣었다. 식재료가 그득한 검정 봉지를 열 때마다 엄마가 무슨 요리를 할 때 이 재료들을 사용했는지 떠올랐다. 고춧가루를 보면 엄마가 만든 김치가 생각났고 얼린 토란대를 보면 엄마가 끓여준 빨간 육개장 생각이 났다. 날짜가 지난 냉동 만두에선 기름 냄새가 퐁퐁 나는 바삭하고 노릇하게 구운 만두가 떠올랐다.
냉장고 청소를 다 한 후 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가슴 한편이 시큰해졌다. 냉장고 청소를 끝내고 샤워를 하러 욕실로 향했다. 수건은 삶아서 쓰는 거라고 한여름에도 수건을 삶아 쓰던 사람이 엄마였는데 욕실에 있는 수건에서 쿰쿰한 냄새가 났다. 냉장고에서도 욕실에서도 지난날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침대 옆 화장대에도 하얀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나이 들면 만사 귀찮다는 엄마 이야기에 물티슈를 꺼내 쓱쓱 먼지를 닦아냈다. 집안 곳곳에 엄마가 묻어 있는데, 엄마는 여전히 여기에 있는데 나는 왜 자꾸 눈물이 쏟아지는 걸까. 엄마가 예전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 만이라도 요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엄마 쑥떡 먹자. 매년 봄이 되면 나랑 같이 쑥 뜯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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