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금지, 무소음 공간 생기다
1999년에 제가 참 잘 다니던 바(bar)가 있었습니다. 연세대학교 근처 신촌의 골목안에 들어가면 지하 1층에 있는 바였는데요. 무언가 자욱한 연기가 드리우는 느낌에 벽면에는 빼곡하게 LP판이 꽂아 있었고 빵빵한 스피커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운 곳이었죠.
(출처: 캔바)
이 곳에서는 신청곡을 넣고 음악을 들으면서 칵테일이나 술을 한잔 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와서 대화를 하려고 해도 도대체 대화를 할 수 없는공간이었죠. 워낙 음악 소리가 빵빵했기 때문에 사운드보다 더 크게 소리를 내어 대화를 하면 오히려 소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 곳을 친구와 방문할 때면 대화를 하기 보다는 신청곡을 메모지에 써서 내고 조용히 앉아 음악 감상을 하면서 그 시간을 오롯이 즐겼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본조비 곡을 참 많이 써 냈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신촌 형제갈비가 있었던 골목 쪽에는 ‘미네르바’라 부르는 굉장히 유명한 커피숍이 있었는데요. 그 커피숍은 마치 70년대로 공간을 이동한 것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며 조용히 차를 내려 마시면서 소곤소곤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오랫동안 조용한 분위기의 공간을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룸으로 이동하거나 프라이빗한 공간이 제공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레스토랑, 대부분의 카페, 술집은 시끄러웠거든요. 어떤 때는 하도 시끄러워서 대화에 참여하고 난 다음날 오전에 목이 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보니 재미있는 공간들이 생겼더라구요. ‘무소음’ ‘침묵’을 지향하는 카페, 북카페, 바(Bar), 술집, 식당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카페, 술집, 식당이라면 으레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것을 가장 먼저 떠올릴텐데요. 그러나 무소음, 침묵을 강조하는 공간에서는 식기 소리, 클래식이나 재즈 음악, 호로록 커피를 들이키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외에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야말로 정적이면서 고요한 상태의 공간에 놓이게 되는 건데요. 좀더 자세히 살펴보니 각각의 카페, 식당, 바에서는 다음의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대화금지 카페/술집 규칙!
V 주문, 요청, 요구 사항 모두 DM 발송한다
V 휴대전화는 무음으로 해야 한다
V 노트북은 사용해도 시끄럽게 키보드, 마우스, 펜 사용 안됨
V 주인장을 포함해 다른 손님이 사진에 나오는 거 금지
대표적인 카페 중에 서대문구에 위치한 ‘침묵’이라는 카페는 방문하면 메뉴판과 메모지를 건네준다고 합니다. 주문을 할 내용을 메모지에 적어 제출하면 되는 거죠
(출처: 중앙일보)
이 공간에서는 공간사용료 1만원을 내면 음료 1잔에 약 2시간 공간을 사용하게 되는데요. 카페 사장의 인터뷰가 “내가 필요해서 만들었다” 라는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느 북카페도 기사에 실려 살펴봤는데요. 이 곳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핸드폰을 일단 카운터 옆 보관함에 보관해야 합니다. 핸드폰 사용을 아예 못한다는 거죠.
(출처: 머니투데이, 휴대폰 사용 금지된 북카페)
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북카페에서는 책과 함께 일회용 귀마개, 독서대, 담요, 머리끈을 비치해 두고 필요해 따라 쓸 수 있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고요. 모든 사람들이 공간의 답답함, 공기의 무거움을 느끼지 않도록 전면의 통창 방향으로 의자를 배치했다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그 외에도 덕수궁 옆에 위치한 공유서재인 마이시크릿덴 (나의 비밀서재)라는 공간은 예약제로 운영하면서 낮에는 대화가 불가능하지만 저녁은 와인바로 변신해 외부의 음식을 가지고 와서 먹을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골방 이라는 혼술 음악바는 리클라니어 소파에 앉아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게 고급 스피커를 보유하고 있다는데 서울, 제주 등 지역에 프랜차이즈로 퍼져 있습니다. 이 공간의 이용시간은 110분입니다.
이러한 공간들이 아직은 많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입소문을 타면서 살금살금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음식점에 가서도 키오스크로 주문하고 대화를 하지 않다보니 오로지 음식 맛과 공간의 분위기, 음악에 집중해 즐길 수 있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피로도를 느끼는 사람들은 디톡스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라고 합니다.
무소음 공간이 앞으로도 유행이 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저는 작년에 읽었던 도둑맞은 집중력이 떠올랐습니다.
집중력을 도둑맞은 시대
작년에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으면서 전체적인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숏폼에 열광하고 인스턴트 푸드를 즐기고, 잘 참지 못해 쉽게 화를 내고 과잉 행동 장애를 보이는 행위가 각 개인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접근 때문이죠.
책에 나왔던 내용 중에 ‘비만’과 ‘다이어트’가 이를 잘 설명하는 내용이라 보여지는데요. 50년 전만 해도 서구 사회에서 비만은 극히 드물었다고 합니다. 모두 마른 체구라 할 정도로 날씬했지만 가공식품, 정크푸드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기존의 신선한 식품들이 이러한 식품들도 대체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1960년대에서 2002년 사이의 성인 평균 몸무게는 그 전에 비해 11kg가 늘었습니다.
체중의 증가에 대해 사람들은 식습관, 건강한 환경을 만드는 솔루션 대신 ‘다이어트 산업’을 발전시켰죠. 그래서 비만의 원인을 ‘내가 게으른 탓’ ‘내가 부족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출처: 캔바)
이에 대한 증명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성공을 해도 살을 뺀 사람의 95%가 1-5년전 이내에 예전의 몸무게로 돌아가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애초에 체중이 늘어난 이유를 놓치기 때문이죠. 저 역시 365일 다이어트로 인한 스트레스가 있고, 운동 강박이 있을 정도인데 참고 살기에 세상엔 먹을게 너무 많고 다이어트에 도움이 안되는 정말 맛나는 음식들이 깔려 있습니다.
이뿐만 일까요? 우리는 강한 자극을 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죠.
요즘만큼 주의력 결핍 행동장애(ADHD)를 진단받는 사람의 수가 많은 적이 없는 듯 합니다. 2003-2011년 사이에만 ADHD 진단을 받은 사람은 미국 내에서 43%가 증가했고, 여자아이 사이에서는 55%나 급증했습니다.. 현재 미국 청소년의 13%가 ADHD 진단을 받으며 대다수는 이에 대한 솔루션으로 각성제를 처방받아요 그래서 오늘날의 각성제 시장은 최소 100억 달러 규모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우리는 정확한 문제 인식을 하지 못한 채 도파민 중독에 걸려 매초 더 강한 자극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고, 집중을 잘 하지 못합니다.
<도둑맞은 집중력>에 나왔던 실험 중에 과학자들이 학생들의 컴퓨터에 추적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그들의 평범한 하루를 관찰했는데요. 학생들은 매 65초마다 하는 일을 전환하는 사실을 발견했죠. 이들이 어느 하나에 집중하는 시간의 중간값은 겨우 19초였고, 성인은 3분에 불과했습니다.
더불어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가 방해를 받을 경우 전과 같은 집중 상태로 돌아오기 위해 평균 23분이 걸린다는 것도 발견했죠.
집중력과 관련해 저는 꽤 집중을 잘하는 편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요즘에는 밀려 들어오는 숏폼에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참을성 없이 1-2초를 보고 재미없으면 콘텐츠를 밀어 올려 다음 콘텐츠를 보는 겁니다.
이렇게 상시 시끄럽고 인스턴트적이고 짧은 호흡의 콘텐츠에 과다하게 노출돼 있다보니 가끔은 모든 전원을 끄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생각만큼 안되죠.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를 조금씩 느끼고는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출처: 캔바)
마케터의 시선
이와 관련하여 마케터의 시각에서 이야기해보자면, 현재의 무소음, 침묵의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한계 상황 속에 생존을 하려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끊어내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과도한 도파민 중독과 강한 각성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사회, 숏폼에 지나치게 현혹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이 모든 모습들에 대한 일부 피로도를 느끼는 사람들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휴대폰을 아예 반납하고 공간에 들어와 무소음 카페를 즐기게 하고, 오롯이 음악과 식기 소리만 들리는 음식점이 생긴게 아닌가 싶습니다.
(출처: 머니투데이, 휴대폰을 맡기는 보관함)
강한 자극에서 멀어지고 싶은 심리, 그리고 초연결 사회에서 항상 사람들, 기계, 사물이 연결돼 있는 것에 대한 극도의 피로로 인해 반대되는 환경을 열망하는 모습 마지막으로 완전한 고립되고 싶지는 않지만 인간관계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싶은 마음이 사람들을 무소음 공간으로 이끄는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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