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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Aug 25. 2023

푸콘에서 보내는 편지

Pucon, Chile

친구야, 잘 자고 있니? 인삿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지구 반대편의 너는 한창 꿈나라일 시간이니 첫마디를 이렇게 띄워본다.


나는 지금 푸콘이라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에 있어. 내일모레 아르헨티나로 넘어가기 전 칠레의 마지막 발자취가 될 이곳은 현지인들에게도 꽤 유명한 휴양지래. 도착하자마자 가볍게 둘러봤을 뿐인데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그럴만한 곳이라고.

어딜 가든 뒤를 돌아보면 따라오는 저 눈 덮인 산은 비야라카 활화산이야. 살면서 활화산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을 줄이야! 어찌나 높고 커다란지 거리가 꽤 있을 텐데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저 산을 나침반 삼아 다니다 보면 아무리 길치인 나라도 이곳에서 길을 잃을 걱정은 없겠어. 참 다행이지?


그러고선 이런 상상을 하는 거야. 갑자기 저 화산이 폭발하면 어떡하지? 비행기는 뜨려나? 영화 <볼케이노>에서는 어떻게 대피했더라? 칠레 대사관 전화번호가 뭐더라? 갑자기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처럼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거 아냐? 나 디카프리오 진짜 좋아하잖아.


의식의 흐름대로 이런 허무맹랑한 상상도 해본다. 원래 상상력 하나로 블록버스터와 로맨스를 넘나드는 영화 한편 뚝딱 만들어내는 나잖아.

그나저나 기억나? 내 생애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을 적 내 옆에 있던 사람이 바로 너였단 거. 네가 내 자전거 스승이나 마찬가지잖아. 타고나길 몸치인 나를 가르치느라 안 그래도 무더운 여름에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힘들어했던 네 얼굴이 떠올라 조금 웃음이 난다.


자전거 핸들을 처음 잡아본 지 30분도 안됐는데, 무슨 패기였나 싶지만 우리 한강까지 가보자고. 해지기 전에 도착해서 거기서 노을이나 실컷 구경하고 오자고 꼬드기던 내 말에 홀딱 넘어왔던 그날에 말이야. 우리 엉덩이 네 쪽 날 뻔했잖아. 분명 지도 앱에선 친절하게도 '자전거로 21분 소요'라고 알려줬는데 말이지. 절대 길을 잘못 들 수가 없는 일직선 자전거 도로일 텐데 여기저기 이탈하면서 다니느라 한 시간 넘게 걸려서 도착한 망원 한강 잔디밭. 그 위에 널브러져서 헥헥댔던 거 진짜 웃겼는데.


도착해서 노을을 만끽하기는커녕 한강의 '한' 정도 보일 때에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잖아. 참 이상하지. 난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영상처럼 재생된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말이야. 잔잔하게 흐르는 한강 수면 위로 누군가 실수로 왕창 쏟은 듯 따뜻한 붉은빛의 윤슬이 반짝이고 있었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던 이온 음료보다 그 한 번의 풍경이 내 갈증을 가라앉히기엔 효과가 아주 좋았던 걸로 기억해.


한참 숨을 고르던 우리는 한번 자리 잡은 곳에서 욱신대는 엉덩이를 뗄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 돌아가는 길에 그냥 자전거 버리고 택시나 탈까? 하며 웃다가 이내 정색하며 자, 다시 가보자. 하며 울면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잖아. 우리 친구가 된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날 처음으로 너에게서 단호함을 봤다니까.

나 말이야, 지금 푸콘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어. 그래서 네가 생각나더라. 나의 처음을 함께해 준 네가. 낮게 떠다니는 양구름과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 뺨을 스치는 조금 서늘한 바람이 '어서 와' 하고 맞이해 주는 것만 같잖아. 저 건너편에서 신난듯 자전거를 타며 서로의 미소를 확인하는 두 남녀를 보니 괜히 낭만이 넘치잖아. 그래서 나도 낭만 넘치는 무언가를 해볼까 싶어 호기롭게 도전한 게 자전거이지 뭐야?


그때 이후로 몰래 자전거 타는 연습을 했었냐고? 아니! 너랑 탔던 그 여름의 자전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으휴. 멍청이. 또 이건 무슨 패기람'이라고 말할 네가 상상이 되네. 맞아. 이건 또 패기야. '그래도 한번 타봤는데 두 번은 어렵겠냐.' 어딘가에서 솟아오르는 자신감으로 든든히 무장한 채로. 막상 자전거를 끌고 혼자가 되니 손에 조금은 땀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칼은 뽑았으니 무라도 썰어봐야 하지 않겠니.


나는 오늘 푸콘에서 가장 낭만적인 여행자가 될 예정이야. 확신하건대 끝내주는 풍경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거든. (그래도 너와 함께 봤던 그날의 노을보다는 덜 예쁠 것 같긴 하다만.) 출발하기 전 괜히 한 번 자전거 벨을 한번 울려본다. 아주 경쾌한 따릉 소리야. 기분이 맑아질 만큼!


당장 답장이 오지 않을 메시지를 남긴다. 내가 잠이 들 시간에 눈을 뜰 너에게 이 편지가 닿아 웃음으로 시작되는 하루가 되길. 자, 그럼 다녀올게! 내 일일 자전거 투어 후기 기대하고 있어! 나 한국 돌아가면 우리 또 자전거 타러 가기. 약속!

[30분 후]

추신.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한번 중심을 잡고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질 못하겠다는 거야. 그러다 보니 도시에서 동떨어진, 인적 없는 외곽으로 나와버렸는데 이런 멋진 풍경을 만났지 뭐니. 이 정도면 성공적인 낭만,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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