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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장열 Oct 07. 2015

길에서 서편제를 만나다

소설 &영화 _서편제 / 이청준, 임권택

시작이 좋다. 10월임에도, 5월이라고 해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그런 날씨였다. 완만한 능선은 길사람들이 만들어낸 흙길은 샐 수 없이 밟히고 눌려 잔잔했다.그 옆으로 펼쳐지는 허리 높이의 갈대와 낮게 깔린 잔디는 선한 바람을 맞으며 흔들렸다. 그야말로 좋은 시작이다. 

그렇게 한두 걸음을 걷다가 정면을 바라보니 문득 지난 겨울에 다녀왔던 남도 여행이 떠올랐다. 그 때는 2월이었음에도 지금처럼 따뜻해서, 입고 왔던 외투를 벗고 한 없이 걸어 다녔다. 그저 걸었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동산에 나있는 길 한복판에서 북을 들고 창을 하며 한을 품었던 세 사람이 떠올랐다.


길에서 송화를 만나다.

문득 ‘서편제’의 송화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평평한 길섶에 자리를 깔고 잠시 앉아 있으니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길과 바람과 하늘은 영화의 장면을 끌어왔고 송화의 손에 이끌려 이청준의 연작소설인 『남도사람』의 첫 편 <서편제>가 꺼냈다.


진짜 소리를 하시던 분이 계셨지요.’

소릿재와 소릿재 주막에서 ‘남자’는 소리를 찾는다. 소리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을 느끼고 이복동생의 한(恨)을 짚으며 ‘여자’의 소리와 이야기를 듣는다. ‘남자’는 그렇게 지치다가도 괴로워하고 한스러워 한다.

소설 <서편제>에서 소리 그리고 대화는 ‘한(恨)’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늦가을 어둑해진 남도의 한 켠을 그려낸다. 주위는 묘지이고 허름한 집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지만 음산하거나 기괴하지 않다. 그저 집중하는 건 애가 끊어질 듯한 ‘남자’의 심정과 이를 의문스럽게 묵도하는 ‘여자’ 그리고 ‘독자’이다.


영상은 그렇게 남도를 불려오고

소설 <서편제>는 영화로 많이 알려져 있다. 히로인이었던 오정혜는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올랐고 14회 청룡영화상, 31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임권택이라는 거장의 손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도 이 영화의 큰 특색이라 할 수 있겠지만 개봉 전부터 칸느영화제 출품작이라는 점을 드러낸 면도 특색이라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화려한 면들이 누구나가 느끼고 공유하는 ‘서편제’라면, 나에게 영화 ‘서편제’는 남도의 잔잔함을 선사해 준 영화이다. 곧잘 등장하는 낮은 산들과 흙, 눌러 내지르는 소리는 시종일 낮은 갈색톤을 연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상은 그렇게 남도를 불러왔고 또 조용히 그리게 만들었다.


‘남도’는 <서편제>를 통해 밀려들 듯 들어와 천천히 각인시켰다. 양미간을 찌푸려야 할 것만 같은 ‘한(恨)’은 그저 묵도하여 공감했고 낮고 너른 땅은 ‘낮게 내려앉은 듯’한 풍광을 지긋이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한 바람이 불고 있는, 남도와는 먼 이곳에서도 그렇게 <서편제>와 남도를 그리는 건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 /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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