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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맛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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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숙 Aug 23. 2019

나물의 맛, 할머니 내음

할머니의 나물반찬








내가 첫째이자 아직 형제도 사촌도 없었을 때, 시골집에서 나는 왕이었다. 나는 왕이었지만 심심한 왕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큰 귀여움을 받았지만 시골집에서는 놀 상대가 없던 나는 심심한 시간의 공백과 싸우는 것이 큰 일과였다.


그 여름은 엄마 아빠도 없이 시골집에 있던 날이다. 엄마는 나의 동생을 해산할 달이 가까워지자 동생을 데려온다며 시골집에 보름 정도 나를 맡겼다. 어린 나는 엄마의 부른 배에서 동생이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엄마의 부재가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엄마가 나를 데려올 날만을 손가락으로 세었다.

하루 이틀 날짜를 세는 손가락이 접혀가면서 여름은 더욱 깊어왔고 여름의 짙은 그림자 속에서 혹시라도 엄마한테 잘못한 것이 있었나 어린 머리로 복기해보기도 하였다.


시골집,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는 집은 조촐한 초가집이었다. 초가지붕 갈이를 하던 모습을 지켜보았던 기억이 있다. 볏짚을 얹은 방 두 칸짜리의  조막만 한 집에는 시원한 나무로 된 마루가 있었고 마루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외양간에 소가 한 마리, 개가 한 마리, 그리고 오른편에는 화장실과 여윈 감나무, 우리 속에 닭 몇 마리가 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가마솥 뚜껑 여는 무쇠 소리, 소여물 익는 냄새가 나면 중간에 한 번씩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마당에 있는 가마솥에서 소여물을 쑤고 있고, 할머니는 부엌에서 국이며 밥을 한창 짓고 계셨다. 나는 마루에 쪼그려 앉아 할아버지한테 잠꼬대마냥 알맹이 없는 질문을 몇 번 해대곤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아침상이 차려지고 나서야 할머니가 이불로 돌돌 말아 일으켜주실 때까지 잠을 잤다. 그 무렵에도 허리가 한껏 꼬부라져서 원만한 곡선을 그리는 할머니의 등은 넘실넘실 파도치며 부엌과 방을 드나들며 먹을 것을 챙겨주셨다. 그리고 내가 칭얼거리기 시작할 때면 그 등으로 제법 무거운 나를 업고 마당을 한바뀌식 돌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맡겨진 나는 참으로 심심했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논으로 나가시고 나면 돌아올 때까지 영락없이 혼자 있게 되는 것이다. 동네에는 어슬렁 거리는 무서운 들개가 제법 있어서 혼자서는 돌아다닐 수 없었다. 혼자 집 앞 논두렁에 핀 토끼풀꽃으로 반지와 팔찌 따위를 만들다가 꽃이 짓이겨져 풀냄새가 손에 밸 때쯤에는 길게 자란 접시꽃으로 내 키를 재보고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워 파리나 잡는 것이 하루 일과인 것이다.


그렇게 묵언수행 아닌 묵언수행을 하다가 어느 날은 초가집 흙벽을 손가락으로 긁어내면 흙이 부스러지면서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흙벽이 먼지가 돼서 바스스 떨어지는 것을 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파내면서도 집이 무너질까 고개를 들어 대들보를 바라보며 걱정도 한번 해주고 다시 흙벽을 파내어 먼지가 되어 떨어진 부스러기를 모아 혼자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귀가를 하고 또다시 저녁을 짓는 연기가 나기 시작할 때까지 흙으로 소꿉놀이를 하고 있으려니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켜던 할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아가씨. 나도 흙 한 사발 주시오’

‘할아버지! 이거 흙 아니에요. 이건 쌀밥이고, 이건 찌개예요. 제가 드릴 텐데 그래도 진짜로 먹으면 안 돼요. 이건 쌀밥이고 찌개지만 흙이니까요.’

‘왜~ 이 하래비는 흙 먹어 본 적 있는데? 흙도 먹으려면 먹을 수 있단다.’

‘그럼 이 것도 먹을 수 있어요?’

‘그 흙 말고 황토흙이라고 깨깟한 흙이 있지. 전쟁통에 먹을 나무뿌리도 없을 때나 먹었지. 지금은 안 먹으련다.’


흙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적잖이 충격이었던지 그날 밤에는 내가 시골집의 흙벽을 죄다 먹어버려서 폭삭 무너져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내가 무너져 내린 기둥 위에서 울고 있는 꿈을 꾸었다.


어느 날은 할아버지가 읍내를 나가신다고 삐걱거리는 자전거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손을 보고 계셨다. 나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애교를 장전해서 만화책을 사달라고 했다.


‘만화책? 그게 무슨 책이냐? 제목을 알려줘야 서점에 가서 말할 것 아니냐?’

할아버지가 물어봤다.

‘할아버지, 그냥 아무거나 그림 많이 그려져 있는 책이면 좋아요. 나 너무 심심하단 말이야. 한권만 사다 줘요.’

나는 영심이나 슈퍼보드 만화책 같은 것을 상상하며 말했다.


한 껏 설렘을 안고 기다린 끝에 돌아오신 할아버지가 책을 한 권, 내 손에 들려주셨다.

나는 방방 뛰면서 방 한가운데 배를 깔고 누워 표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흑백으로 심각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던 책은 박정희가 나오고 YS가 나오고 DJ란 용어도 나왔다. 정치만화책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참을성 있게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할아버지 YS가 모야?’

‘YS? 김영삼이지?’

‘그럼 DJ는?’

‘그건 김대중이지’

‘사람 이름을 왜 이렇게 써?’

‘그러게 이름 내버려두고 왜 어렵게 썼다니?’


‘할아버지가 모르면 어떻게! 나보고 이런 걸 읽으라고 사 온 거야? 이런 건 못 읽겠어. 나 만화책! 영심이! 슈퍼보드 이런 거 없었어? 으아아앙’

여름 땡볕과 같은 심심함과 짙은 그림자와 같은 기다림에 지친 나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막걸리에 안주로 담배를 뻐끔뻐끔하며 옆으로 누워계시던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당황해서 그저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주셨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은 투박하고 거칠거칠하고 콜록콜록하게 만드는 담배냄새로 엄마의 손과 다르다는 생각에 더욱더 서러워져서 할아버지 손을 밀치고 목청을 세워 더 울어재꼈다.


‘나 집에 갈 거야! 집에 갈 거야! 나 엄마 보고 싶어! 엉엉엉’

할아버지도 적잖이 당황했던지 한번 호통을 치시곤 다시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누워버리셨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할머니도 놀라 달려오셔서는 나를 품에 안아 가만히 토닥였다.


‘그래 그래 엄마가 보고 싶어~? 보고 싶지, 그래. 오구오구 내 새끼. 많이 서러웠어~’

토닥이는 할머니 품에서 엉엉 울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계속 이마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 손보다는 가녀린 손가락이지만 여전히 거칠거칠하며 밥 냄새와 흙내음이 스며있었다.

‘우리 새끼 깼니?’

할머니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웅...’

나는 멋쩍어서 아직 잠이 덜 깼다는 걸 어필하듯 주먹 쥔 손으로 두 눈을 문지르며 뾰로통한 입술 모양을 했다.


‘그럼 밥 먹자. 배고프지?’

옆에 천보자기를 덮어놓은 상을 쓰윽 밀어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할미가 부엌에서 따땃한 밥이랑 국 퍼올 테니 좀 먹고 자자.’

천보자기로 덮어놓은 상에는 언제나와 같은 할머니 반찬들이 올려져 있었다.

할머니의 반찬들은 대부분 집 바로 뒤 비탈밭에서 나왔다. 고사리 무침이랑 들기름에 달달 볶은 들깻잎 볶음, 애호박 무침, 물렁물렁한 가지무침 등등 가지각색 나물반찬들이었다.


나는 아직 뾰로통한 입술 모양을 풀지 않고 밥상 앞에 앉아있으려니 할머니가 흰쌀밥에 고사리나물을 얹어주셨다.

‘잘 먹어야 안 아프지. 안 아파야 엄마가 몸 풀고 데리러 왔을 때 얼른 따라갈 것 아니냐.’

할머니가 떠주는 밥을 못 이기는 척 한입 먹었다.

‘잘 먹네 내 새끼. 자, 밥 말아서 고깃국도 먹자.’

할머니는 밥을 소고기 뭇국에 말아주시고는 들깻잎 볶음을 수저에 올려주셨다.


팅팅 부은 눈으로 먹으면서 속으로 나물반찬의 풀내음이며 흙 내음이 할머니의 것과 닮았구나 싶었다.

할머니의 손이 닿았으니 할머니 냄새가 음식에 배인 것일까? 아니면 이 내음이 할머니의 손과 품에 배인 것일까?


봄에 캐서 잘 말린 후 다시 삶아내어 만든 고사리나물에서는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입 안에 퍼지면서 기분 좋은 흙 향이 끝에 머물렀다.

이슬을 잔뜩 머금은 깨끗한 황토흙의 맛이 이것과 닮지 않았을까 잠시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들깻잎 볶음 역시 비탈밭에 기르던 들깨에서 딴 잎으로 역시 들깨에서 짜낸 들기름으로 볶은 것이다.

한 여름, 들깨밭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철 모르고 일찍 비행을 시작한 고추잠자리를 쫓으며 놀곤 했는데 그 사이를 뛰어다닐 때 나던 풋내가 들깻잎 볶음에 한 움큼 들어있었다.


한 여름 시골집의 냄새와 할머니의 냄새가 나물 반찬들에 한 움큼 들어가 어느새 마음이 풀어져 국그릇을 들어 남은 국물까지 벌컥벌컥 들이마시고야 식사가 끝이 났다.

‘엄마가 해주는 밥만 못하지?’

‘아니 맛있어요. 할머니. 나 이제 나물 맛있어.’

할머니는 잘 먹어서 예쁘다며 연신 머리며 등을 쓰다듬었다. 그 따뜻함에 서운함은 녹아버린지 오래였다.


지금 와 생각하면 나물의 맛을 몰랐던 내가 싱그러운 나물의 맛에 눈을 뜬 순간이지 싶다. 그리고 동시에 나물 속에 추억을 듬뿍 담아버렸다.

나물은 할머니의 품에서 나는 따뜻한 냄새와 닮아서 거칠거칠하고 투박하지만 가녀렸던 손으로 나를 한없이 소중하게 토닥였던 할머니가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생각나면 뒤이어 그 무렵의 여름햇빛, 풀 내음과 흙 내음이 가득한 공기, 그 속에서 놀던 나, 엄마를 기다리며 그리워 하던 내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금도 이따금씩 나물 한 입에 그때 그 할머니가 떠올라 그리움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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