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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백 Jun 04. 2020

무기력을 향한 투쟁

 한 달이 넘도록 끔찍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무기력의 증상은 다음과 같이 찾아왔다. 가장 먼저 낮과 밤의 구분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깨어있는 시간과 잠들어 있는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 낮에는 늘 몽롱했고, 늦은 새벽에는 온몸이 경직되고 갑갑해 이불을 박차기 일쑤였다. ‘저녁과 아침은 자신의 내적 우주로 들어가는 문’이며, ‘그 문으로 어떻게 들어가고 나오는지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나의 경우에는 아예 ‘그 문’이 박살 나버린 기분이었다. 자고 깨는 시간이 들쭉날쭉이니 덩달아 식사시간도 불규칙해졌다. 낮에는 대게 식욕이 없었고, 밤이 되면 아무리 먹을 것을 밀어 넣어도 끝없이 속이 허했다. 슈퍼에서 긁어모으듯 인스턴트식품과 싸구려 과자, 맥주를 사들고 와 먹어치우기를 반복했지만 그 어떤 것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살이 부쩍 쪄서 인생 최고 몸무게를 갱신했다. 잘 입던 옷들이 금세 불편해졌고, 달라진 몸을 내려다볼 때면 우울해졌다.  


 이 모든 끔찍한 증상들 가운데서도 가장 미칠 노릇인 것은, 바로 ‘해야 할 일’과 ‘하게 되는 일’이 제각각 따로 논다는 점이었다. 두 행위에서 그 어떤 접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신청해놓은 요가 수업도 가고, 갖가지 운동을 해서 원래의 체중을 되찾아야 했지만 좀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귀찮고 불안한 마음에 괜히 집안 곳곳을 서성이다 TV를 틀거나 맥주를 꺼내마셨다. 책을 읽고 자료들을 모아두어야 했지만 도무지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자꾸만 핸드폰에 손이 갔고, 평소에는 보지도 않던 오만 잡동사니들을 찾아보는데 몇 시간을 훌렁 보내버리곤 했다. 자극적이고 파편적인 인터넷의 언어가 편리하게 느껴짐에 따라 더더욱 긴 글을 읽기가 힘들어졌다. 각종 업무를 처리해야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선뜻 해내지 못했다. 하지 못한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갔고, 나중에는 뭐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서 포기하거나, 묵혀두거나, 질 나쁘게 해치워버리기를 반복했다. 급기야는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지금 나라는 사람의 가치까지 의심하고 폄훼하는 지경에 이르러있다.




 오늘 오후,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다급하게 책과 잡지들을 펼쳐보았다. 여전히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이 페이지 저 페이지를 난잡하게 훑어보던 중 하나의 문장을 발견했다. <Breathe>라는 잡지에 실린 리더십 코치 엠마 타이난의 말이었다.


 가치를 판단하고 움직이는 건 우리 자신뿐입니다. 가치를 믿는 사람만이 그것을 얻게 되는 거죠. 이는 마치 온도 조절 장치와 같아서, 온도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그 온도에 이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온도를 설정하고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고장이 났구나. 고장이 제대로 났어. 나는 금이 가고 녹슬어버린 내 안의 ‘온도 조절 장치’를 떠올렸다. ‘가치를 판단하고 움직이는 건 우리 자신뿐’이라는 말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 견고한 무기력증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진단하고, 치료해야 한다니.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어디 힌트라도 있겠지 싶어 잡지를 마저 읽어보았다. 같은 글의 말미에서, 저널리스트인 아미 스코필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찾고 키워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익숙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니체를 떠올렸다. 니체는 ‘강건한 정신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찾아다니고, 그것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을 강화하고 고양시킨다’고 믿었다. (박찬국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중 발췌) 이들의 주장처럼, 나는 익숙함을 버리고 불편함과 고통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 끝에서 삶의 가치를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나의 무기력한 삶이 충분히 고통스럽다. 그 어떤 쪽도 고통이라면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살고자 노력해봐도 좋지 않을까. 일단 침대에서 벗어나 좀 씻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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