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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연 Jul 20. 2016

Axt no.006 2016.5/6 이장욱


애정하는 작가 이장욱이 커버인 악스트 5/6월호.

정신이 없었는지라 7/8월호가 나온 지금에서야 뒤늦게 구했다. 책의 중간쯤을 펴 그의 인터뷰부터 읽었다. 나는 잘 쓴 인터뷰 기사의 긴장감을 좋아한다. 이 인터뷰는 그랬다. 순문학을 이야기할 때는 인터뷰어의 날이 서 있음이 좋았고, '졸라'라는 단어를 거르지 않은 것도 좋았다.


인상적인 구절을 발췌한다. 


* 대부분은 이장욱의 대답. (배)는 배수아의 질문.


- 제 생각에는 미국 작가들보다 한국 작가들이 레이먼드 카버를 더 잘 즐길 수 있는 면이 있어요. 미국 작가들은 익숙한 문법과 자연언어의 공기 속에서 카버를 읽는 거고, 한국 작가들은 다른 언어와 문화의 맥락이 주는 신선함 속에서 일게 되니까요. ‘카버를 이해한다’는 면에서는 미국 작가나 독자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카버를 즐긴다’는 면에서는 한국 작가나 독자에게 창조적 어드벤티지가 있다는 말이죠. 


- (배) 표준어 사용자, 중년, 남성, 이성애자, 교수. 이런 것이 어떤 점에서 소설가로서 긍정적인 조건이 아니라고 하시는 건지요.

(이) 간단하게 말하면 소수성 문제죠. 가령 가부장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여성은 자기도 모르게 제 안에서 소수성이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시인 작가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요? 마이너리티의 요소가 작가한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뻔한 얘기지만 대한민국은 수도권에 사는 중년-남성-이성애자-지식인이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잖아요. 일단 구리죠.(웃음)


- 반면에 픽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 있잖아요. 사실 다큐멘터리가 픽션보다 더 힘이 있고 더 현실적이죠. 사회적 영향력도 강하고. 그런데 자장커가 다큐와 극영화를 뒤섞거나, 키에슬롭스키가 다큐를 찍다가 극영화로 전향한 이유를 보면 비슷한 데가 있는 듯해요. 실제의 삶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이미 실제가 변형되잖아요. 프레임에 갇히니까. 진실이나 비밀은 자꾸 은폐되고. 은폐된 걸 파혜쳐서 진짜 실제를 찍으면 또 그건 감당할 수 없는 과잉이나 두려운 것이기도 하고. 반대로 소설은 픽션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종의 진실에 접근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 사건 처리 가설이라는 게 있는데, 뇌가 처리해야 하는 정보량에 따라서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거라고 해요. 이건 누구나 경험적으로 느끼는 거잖아요. 처음 가는 길은 시간이 천천히 가고, 매일 다니는 길은 금방 가고……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외부 정보들이 뇌에 이미 코드화돼 있기 때문이잖아요. 외부 정보들을 쉽게 쉽게 처리해버리는 건데, 비약해서 말하자면 이게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의미와 비슷해요.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고 하는데, 실은 이것도 코드화가 많이 돼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아요. 정보 처리 과정이 편해질 뿐인 거죠. 주어진 코드 밖으로 나가는 건 그만큼 어려워지는 거고.

어쨌든 여행은 우리 몸이 처리해야 할 정보량이 많아지고, 그 과정에서 우리 내부에 신선한 충돌이 발생하는 시간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자이다. 모든 장소를 고향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는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한 자이다.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감독의 작가의식이나 내러티브의 매력보다 배우의 물질적인 이미지가 압도하는 영화가 있어요. 그게 더 매혹적일 때도 있더라고요. 최근에 <스틸 플라워>라는 독립 영화를 봤는데, 영화 자체보다는 정하담이라는 배우에게서 받은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느낌이 좋았어요. 그런 게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배) 문제는 용어 자체가 차별적이에요. 순결 불륜 창녀 결손가정, 이런 어휘처럼요.


- 사실 잠수함 속 토끼 역할은 지금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나 칼럼스트들이 더 민감하잖아요. 시인 작가가 모든 면에서 더 예민하다고 전제하는 건 지나치게 관습적이고 낭만적인 관점이에요. 좋든 나쁘든 모든 사람들의 신경회로가 열려 있는 시대니까요. 가령 시나 소설은 이제 잠수함 속 토끼가 아니라 캥거루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배) 잠수함 속의 토끼가 아니라 캥거루라고요?

(이) 가령 더 오래 품고, 느리게 품고, 깊게 품고, 덜 센세이셔널한 방식으로, 덜 대중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 같은 거죠. 과도하게 스피디한 세계와 달리, 문학만이 할 수 있는 느리고 깊고 그래서 잘 안 보이고 천천히 각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얘기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문학이라는 고유한 장르가 다 사라져버려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내가 없으면 세상이 안 돌아갈 것 같지만 안 그렇거든요. 끊임없이 역할을 재분배하는 개미 사회와 비슷한 거죠.

가령 현대미술이 발전한다는 게 뭘까 생각해보곤 해요. 경매가가 올라가는 게 발전이 아니잖아요. 재벌가의 지하실에 걸작이 늘어난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죠. 오히려 미술이 예술로서의 고유한 속성이 점점 희박해지면서 사람들 속으로 침투하고 도시 속으로 침투하고 건축이나 디자인, 패션으로 침투하는 게 자연스러워요. 실용성을 옹호하자는 게 아니에요. 건축 디자인 패션이 오히려 실용성을 약화하고 예술화되는 거죠. 궁극적으로는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과 삶이라고 하는 것의 경계가 희박해지는 데까지 이르러서 결국 예술이 사라졌다, 미술이 사라졌다고 느껴지는 상태가 오히려 미술이 완성되는 단계라고도 할 수 있겠죠. 



-


현실감각과 균형감을 모두 갖춘 사람. 인터뷰를 다 읽고 매력에 더 빠지게 됐다. 

그 동안 산발적으로 읽어온 작품을 정리하고, 감상평도 써야지. 

브런치에 이장욱 월드를 건설할 때까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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