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를 좋아한다. 비가 오면, 비가 올 듯하면, 절로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말을 듣는 누군가는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나도. 빗소리가 참 좋아.’
비가 좋다는 말은 보통 빗소리가 좋다 혹은 비 내리는 풍경이 좋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빗소리가 좋다고 말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그렇다고 답한다.
사실 나는 비 맞는 걸 좋아한다. 종종, 아니 가끔도 아니고 단 몇 번이었는데도 비 맞는 게 엄청 재밌었다.
중학교 때였다. 비가 엄청 내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우박이 떨어졌다. 타이밍 좋게도 딱 쉬는 시간까지 우박이 내렸다. 나와 친구들은 당장 뛰쳐나가 우박을 맞았다. 조금 녹아서 형체가 흐릿한 얼음 같은 우박을 그날 처음 봤다. 이런 건 직접 맞아야 한다며, 다음 수업 시간과 그 이후의 일과는 신경 쓰지도 않고 우박 속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상치 못하게 비가 쏟아진 적이 있었다. 딱 봐도 소나기였지만, 비가 그치길 기다리기보단 잠깐의 빗속에 뛰어들고 싶었다. 교복부터 운동화, 양말까지 온통 흠뻑 젖은 나는 더 이상 젖을 곳이 없어서 빗속에서 가장 자유로웠다.
요즘은 적당히 비를 맞을 타이밍을 잡는 게 좀 어렵다. 일정이 있는 날은 비 맞은 후가 걱정돼서 포기한다. 일정이 없더라도 혼자서 비를 맞기엔 청승맞을 것 같아 동네에서 좀 그렇고, 그렇다고 비를 맞겠다고 딴 동네로 가는 건 웃기다. 우연히 우산이 없어 비를 맞는 일이 생기면 또 모르겠는데, 요즘은 골목마다 편의점이고, 장마철에는 우산을 파는 카페도 있다.
그래도 비가 오는 어느 날이면 갑자기 비를 맞을 일이 생기지 않을까. 그냥 갑자기 그러고 싶어 지거나, 같이 걷는 누군가가 비를 맞자고 하거나. 어찌 되었든 일단 비가 오면 그런 가능성은 생긴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긴 좀 부끄럽다. 그래서 그냥 빗소리를 좋아한다고 한다. 비 오는 풍경도 빗소리도 비가 오는 하늘도 내겐 부가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비를 좋아한다.’는 말 뒤에 가장 담백하게 붙일 수 있는 건, 다수의 취향이다.
사실 이건 비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구체적 취향을 숨긴 채 다수의 취향에 묻어가는 일이 종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