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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사 Oct 22. 2023

어쨌든 장르는 시트콤

우리의 장르는 시트콤이다.     


K: 와! 지금 딱 비 그쳤다. 빨리 나가야겠다.

나: 나도 그래서 나왔는데, 나오니까 비가 쏟아진다. 나 나올 때까지 기다렸냐고!!

나: 식당 도착하니까 비 그치는 거 무슨 일이냐ㅋㅋㅋ

K: 나 도서관이다. 공부해 본다.

나: 오! 나도 책 빌려야 하는데. 일단 다 놀고 간다.

나: 도서관이가?

K: 아니ㅋㅋㅋ 친구랑 고기 먹으러 왔다.


우린 리트리버다.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고독해지기 힘들다.     

  어제는 다음 주에 있을 여행 계획을 짰다.


K: 진짜 힐링 여행이야 힐링! 우리 이날만 그리면서 지금부터 빡세게 살아보자!


그러나 계획이 마무리되고 말했다. 


나: 이거 수련회냐?

K: 이날을 위해 체력을 길러 놔야겠는데? 

나: 야, 우리 둘째 날 아침 먹을 시간 없나? 계획표 왜 이래ㅋㅋㅋ


우리의 계획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계획과 계획표와 실상은 늘 따로 놀고, 계획은 일어날 수도 있는 가능성 중 하나가 된다.     


  전에는 퇴사를 결심한 친구와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했다. 통화 중 생각이 났다.


나: 야, 동구에 오늘 저녁부터 단수라며!!! 물 받아놨나? 

K: 미친...나 퇴근해서 아직 안 씻었는데?

나: 난 낼 출근해야 한다. 어쩌는데ㅋㅋㅋ


  회사와 동료들 이야기로 심각했던 우리는 대화를 끊고 부랴부랴 슈퍼로 달려가서 생수부터 샀다.      

     

  우울하고 처연한 분위기도 아무나 갖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런 분위기도 좀 우아하고 고상해야 나오는 듯하다. 울적한 날 울적한 친구를 만나면 꼭 장르는 코미디로 바뀐다. 넘어져서 우는 게 아니라 자빠져 웃겨 된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생긴 코미디는 현실을 보게 만든다.      


  계획이고 뭐고 앞날은 날씨만큼이나 알 수 없고, 혼자 싸매고 뭘 해결하려고 독하게 마음먹어봐도 사람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내일 출근이 막막해서 눈물이 나지만 당장 씻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어이없고 짜증 나다가도 그렇게 어찌어찌 웃게 되면 몸에서는 힘이 돈다. 홀로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우아함 같은 게 있는 어른이 될 줄 알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장르는 시트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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