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때 쯤 어느 날
6월 중순이 다되고서야 받은 내 생일선물은 바질씨앗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씨앗과 씨앗을 심을 수 있는 화분과 흙까지 함께 사달라고 대학교 동생에게 요구했다. 뜬금없이 바질을 키우고 싶었던 이유는 인터넷에서 바질을 키워 파스타나 피자를 만들 때 쓰거나, 바질 페스토를 만드는 글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잎을 따서 사용하면 잎은 다시 자라나고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세상에 이렇게 환경을 생각하면서 비싼 바질을 무한으로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끈기는 부족해도 일을 벌이는 것은 자신 있던 나는 눈을 반짝이며 ‘이거다!’ 생각했고, 받지 못한 생일선물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참고로 평소에 바질을 찾아먹은 없었다.
며칠 뒤 택배가 도착했고 나는 신나서 해체작업을 시작했다. 작은 바질씨앗이 여러 개 있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릴 때는 요 작은 씨앗으로 꽃이 피고 큰 나무가 자라는 현상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씨앗 안에 큰 나무가 작아져서 들어가 있는 걸까’ 하고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든 작은 생명은 어린아이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좋은 재료였다. 수박씨를 먹으면 수박이 뱃속에서 자라나 배가 뻥 하고 터져버리는 줄 아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수박씨를 최대한 잘근잘근 씹어서 삼킨 기억도 난다. 어쩌다 통째로 삼킨 날이면 엄마에게 몇 번이고 물어봐 ‘뱃속에서는 수박이 자랄 수 없다’는 확답을 얻어내고 안심했었다.
바질을 심기 위해 첫째로 화분에 흙을 담았다. 화분은 손바닥 두 개만 한 가로로 긴 검은색 화분이었다. 집안에 두자면 작은 게 좋지만 또 너무 작으면 바질을 많이 수확할 수 없으니 중간 정도의 사이즈를 선택했다. 흙은 촉촉하고 보들보들한 것이 감촉이 좋았다. 흙을 높낮이가 고르게 펴 담은 다음, 손가락으로 나란히 10개의 홈을 냈다. 구멍이 너무 깊으면 바질이 고개를 내밀기 힘들고 너무 얕으면 바질이 뿌리를 내리기 힘들 테니 적당한 구멍으로 씨앗을 안심시켜주는 게 중요하다. 이곳이 씨앗이 몸을 뉘일 곳이다.
그리고 하나의 홈에 씨앗을 세 개 남짓 넣어준다. 이 세 개의 씨앗은 예선전을 치러 몇 개의 새싹만이 솟아날 기회를 가진다. 힘들게 뿌리를 내려도 한 홈에 한두 개의 새싹만 남기고 솎아내야 한다. 식물의 세계도 나름 치열한 경쟁이 있다. 손에 잡기도 힘든 작은 씨앗을 넣어주고 나니 조금 뿌듯함이 차올랐다. 그다음 씨앗에게 흙 이불을 살살 덮어주었다. 흙침대라고 들어봤나, 이게 바로 천연 흙침대다. 흙을 담을 때처럼 다시 평평하게 토닥여주었다. 마치 잘 자라고 토닥이듯이. ‘무럭무럭 자라라’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맛있게 먹는 상상을 했다.
그 화분은 거실 창문 바로 앞 엄마의 식물 컬랙션 중간쯤 자리를 잡았다. 엄마의 개인적 취향으로 거실에 꽤 많은 화분이 있었는데 주의 깊게 들여다본 적은 없다. 그 공간은 오롯이 엄마의 것이었다. 하지만 ‘내 것’인 화분을 들여다 놓으니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가게 되었다. 꽃도 있고 화초도 있고 꽤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덩그러니 흙만 있는 내 화분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화분 가운데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건 내 것뿐이니 조금만 참자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다른 취향이다. 물도 가끔 주면서 언제 초록잎을 보나 기다렸다. 새싹이 길어져야 하는데 애꿎은 내 목만 점점 길어져서 빠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관심에서 잊혀 갈 때쯤 소식이 들려왔다.
"너 꺼 허브심은 거 이파리 났더라"
"내 거? 바질?"
"바질이야? 그게? 봐봐"
"오, 진짜 났네!"
작은 초록 이파리가 옹기종기 자라나 있는 걸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작은 씨앗이 흙을 뚫고 나오다니, 새삼스레 생명의 경이로움이 조금 느껴졌다. 이 흙을 뚫고 나오기까지 햇빛을 모으고 물을 모으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차곡차곡 기를 모아 한번에 쏘는 거지. 에. 네 .르 . 기 . 파아아!!
각설하고, 작은 화분에 너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새싹을 솎아야 했다. 하지만 아까워서 차마 뽑을 수 없었다. ‘어떻게 심은 건데...... ’라는 마음 반과 ‘잎을 많이 따야 하는데......’라는 마음 반이었다. 자본주의 시대에 적은 투자로 많은 효용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하.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안 자라기야 하겠어. 스파르타다 얘들아. 살아남아라. ’
하지만 내 바람을 비웃는 듯, 바질은 얼마 자라는가 싶더니 새싹인 상태에서 성장을 멈춰버렸다. 목만 긴 새싹이 되었다. 한 달이 더 지나도 새싹이었다. 나는 솎아내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래서 황급히 새싹을 뽑았다. 많이 먹고 자시고 단 한 잎의 바질도 구경 못 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남은 몇 개의 새싹이라도 잘 자라기를 빌었지만 뭐가 문제인지 성장에는 아무런 진도가 없었다. 나중에는 바질이 자기 떼어먹을 줄 알고 일부러 저러나 라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내 목적은 식용이었기에 그 간절한 마음을 듣고 겁먹어서 안 자라는 구나하고 멋대로 단정 지어버렸다. 중앙을 차지했던 내 화분은 구석 바닥에 밀쳐지고 말았다.
그 후로부터 또 몇 달이 지나고 문득 바질을 보았다. 징하게도 그대로였다. 근데 그날따라 저 자라지 않는 바질이 마치 나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 자라 버린 바질처럼 끊임없이 잎을 생산해야 하는 거다. 나를 위해서보다 남을 위해, 잎이 뜯겨도 묵묵히 할 일을 다 해야 하는 거다. 나를 끊임없이 소모해야 하는 역할이다. 어른이란 건. 바질처럼 나 또한 저렇게 애매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어른이 되기 싫어서. 끊임없이 나를 소모시키는 과정을 겪기 싫어서. 밑으로 밀려난 화분은 결국 햇빛을 덜 받고 잊히고 버려질 것이다. 힘들게 싹을 틔우고 솎아져서 살아남았다. 조금 더 지켜봐도 되는 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하며 나는 조금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질을 이해해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