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뜻깊다. 아마도.
눈을 뜬다. 창문의 반투명 코팅 조각 틈 사이로 오늘의 날씨를 가늠한다. 날씨가 흐리면 조금 더 게으르고싶고, 날씨가 맑으면 서럽다. 멍하니 눈을 껌벅이다 특별한 소식없을 휴대폰을 확인한다. 역시나 별일은 없다. 습관적으로 여러 sns을 기웃거린다. 마음은 불편하다. 이불 속에서 삼십분정도 같은자세를 유지하다 양치질을 하러 나간다. 거울을 보니 애타는 마음과 달리 피부는 고와지고, 붓기는 줄어 얼굴색이 말갛다. 어이가 없어 콧웃음을 친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가만히 고민한다. 갈 곳이 없다. 나름 희미하지만 용기있는 계획을 가지고 퇴사를 했고, 꽤 의미있는 긴 여행을 건강하게 마무리 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새로운 경험을 쌓을 준비를 하던 중 뜻밖에 코로나라는 역병이, 꿈에도 상상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이제 나는 현실로 어떻게 돌아가야할 지 막막해졌다.
다시 일어나 씻어본다. 옷도 적당히 기분좋게 차려입는다. 노트북과 책을 챙겨 집을 나선다. 버스를 타고 사람들이 많은 카페에 가고싶기도 하고, 집앞에 빵이 맛있는 카페를 가고싶기도 하다. 결정을 못해 제자리에서 십분을 서있다 발닿는 대로 걷기로한다. 여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걷다보니 봄바람에 기분이 좋아 버스를 타기로 한다. 역시 버스가 최고다. 심지어 요즘 이 노선에 전기버스가 늘었는데, 전기버스는 소음도 적고, 공간도 훨씬 넓고, 창도 크다. 아마 오늘하루중 최고의 시간이 될 것같다. 내릴때쯤 되니 또 어떤 카페를 가야할 지 모르겠다. 다시 걸어본다. 엉덩이에 힘이라도 주고 걸으면 운동이 될테니까 시간을 덜 낭비하는 것 같아 약간의 위로를 받는다.
자주 오지 않는 부산은 길은 익숙하더라도 가게들은 자주 바뀌는 탓에 아는 곳을 찾아갔다가 이미 폐업한 일이 일수다. 계속 걸어본다. 이 카페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싫고, 이 카페는 의자가 아플 것 같아서 싫고, 이 카페는 전남친과 추억이 묻어있어 싫고, 이 카페는 비싸서 싫고. 대학가 앞거리를 크게 한바퀴 다 돌고 말았다. 그러다 자라(zara)가 눈에 띈다. 내가 사고싶다고 했던 원피스가 세일중이라는 친구가 보낸 의리넘치는 나쁜 정보가 기억난다. 한번만 입어보기로 하고 들어가본다. 지난번에 입어봤을 때보다 곱절로 더 이쁘다. 10개월째 무직상태의 지갑은 예전에 한계에 달했는데... 다음주까지 카페가지말기로 다짐하고 삼만원짜리 원피스를 결제한다. 왠지 이 원피스는 자주 입을 수 있을 것 같고, 멋도 있는 것같고, 더 세련되보인다. 지금 꼭 필요한 물건인것같다.
매장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가방에 노트북과 책두권, 텀블러를 가지고 쇼핑을 하고 돌아온 이 알 수 없는 외출을 서둘러 마무리 하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좋긴한데 머저리같기도 하고 그냥 좋은 것같다. 집에 돌아와 허기진 배를 대충 채운다. 가만히 앉아있다 식탁 한구석에 정신없이 쌓여있는 믹스 커피들에 시선이 멈춘다. 하나씩 뜯어 내용물들을 분리시킨다. 거름채위에 부어내 숟가락으로 톡톡톡 쳐내면 장인이 하루하루 해내야 하는 중요한 일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 같아 집중이 더 잘 된다. 열봉지 정도 뜯었더니 커피가루가 간장 종지에 수북할 정도로 쌓인다. 달고나커피가 생각나 실행에 옮긴다. 사천번은 저은 것 같은 데 내것은 좀 이상하다. 그렇지만 아무 기대가 없어서 실망할 것도 없다. 맛 또한 실망할 것도 없는 맛이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이 다가온다. 그때쯤 잠이 몰려온다. 동시에 30살에 가까운 딸이 오늘도 어제처럼 이불속에 누워있는 채로 아버지를 맞이 하기엔 부끄러운 양심도 함께 몰려온다. 요즘의 유일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침대에서 일어나 세대주와 세대원들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