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신입생 때의 이야기다. 그 시절엔 입학 전에 싸이월드나 다음 카페 같은 커뮤니티에 신입생들이 모이곤 했다. 서로 인사도 나누고, 입학하면 밥이나 먹자는 약속을 하여 자연스레 무리가 형성되었다. 당시에 나는 또래들이 했던 싸이월드를 하지 않았다. 커뮤니티 상에서 통성명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입학했다. 낯가림이 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엠티도 가기 싫었고 ‘새터’라고 불리는 (아마도 새내기 배움터의 줄임말) 술만 잔뜩 마시는 모임에도 가기 싫었다. 하지만 빠지게 되면 4년 내내 혼자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고등학교 친구들의 이야길 듣고는 그날 저녁, 새터에 나갔다.
학교 앞 술집이라고는 투다리밖에 없었다. 무리 지어 앉은 우리 학과 친구들에게 선배들은 이름이 뭐니, 나는 누구니… 하면서 인생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핸드폰 번호도 교환했고, 술잔이 몇 번 오갔다. 공식적인 첫 음주가 시작된 나이, 동기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부어라 마셔라였다. 내 옆에도 어떤 남자 선배가 앉았다. 우리 과의 대표라고 했다. 그 과 대표는 술자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취했다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슬쩍 보니 억지로 눈을 감았을 때처럼(?) 눈이 파르르 떨렸다. 100% 안 졸린데 졸린 척하네 이 새키. 평소 눈치가 둔한 편인 나였지만, 그 ‘기댐’은 잘 거절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속이 쓰려 우유를 사 오겠다며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고등학교 친구와 통화하며 시간을 끌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내게 몸을 기대었던 그 과 대표는 또 다른 동기에게 기대고 있었다. (기대는 게 취미인가) 그 동기 역시 나처럼 조용하고 어울리기 어색해하는 친구였는데 - 퍽이나 난감해 보였다. 게다가 기숙사에 들어간 첫날 같은 과 동기라고 이미 인사를 한번 나눈 사이였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술자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힐끔힐끔 그 과 대표와 기댐을 당해 몸이 반쯤은 옆으로 쏠린 여자애를 보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어린 신입생에게 머리를 기대고, 졸린 척을 하다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왜 저럴까? 저 새끼. 자리에 앉아 나도 모르게 그 선배에게 말했다. “졸리시면 집에 들어가세요. 선배” 너무 조그맣게 말했는지 안 들렸나 보다. 나는 그 선배를 흔들며 다시, 목소리를 좀 더 키워 말했다. 마침, 소주잔들이 탁 부딪치고 각자의 입으로 돌아갈 때였다.
“아, 졸리면 집으로 가라고요.”
정적이 흐르고 순간 시선이 쏠렸다. 그 선배는 연기하듯 눈을 깜빡거리며 아우 피곤하다 하면서 미안하단 말도 없이 일어났고, 담배를 태워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볼륨이 서서히 올라가는 느낌, 술자리가 다시 왕왕대기 시작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까 통화를 했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과대라는 새끼가 여자애들 어깨에 기대면서 수작질 부리고 있어. 씨발. 더러워” 메시지가 전송되었다는 표시가 나고, 어쩐지 수신인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내게 어깨를 기댔던 그 과 대표였다. 술김에 메시지 속 대상에게 잘못 보냈던 거다. 아뿔싸. ㅈ됐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별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싸로 지내다 그 과 대표가 졸업했나, 군대에 갔나 - 어느 순간 학교에서 안 보이게 되자 나도 자연스럽게 그 사건을 잊어갔다.
그리고 사회인이 되어 그 선배를 회사에서 다시 만났다. 회사 조직도에서 그 이름을 보자,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내가 침묵했다면, 그 선배와 마주쳤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머릿속에선 ‘말하지 마! 가만히 있어!’ 했었는데 술김인지 본능인지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던 그날. 시간이 지나 다시 그 일을 마주하자, 그때 느꼈던 두려움은 사라지고 떳떳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못 본 척했을 일을 나는 참지 못해 말했던 일. 시간이 지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을 때쯤, 하지 말라했던 일을 한 것은 떳떳한 일이 되어있었다.
본능을 건드리는 일은, 아무리 모두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 한다.